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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 논설위원이 간다] 시니어 문화파워와 뉴트로가 만나 일 냈다

중앙일보 2020.03.26 00:35 종합 29면 지면보기

트로트열풍 어디까지

TV조선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가수들. 왼쪽부터 ‘미스 트롯’ 우승자 송가인. ‘미스터 트롯’ 톱 3인 임영웅, 영탁, 이찬원. [TV캡처]

TV조선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가수들. 왼쪽부터 ‘미스 트롯’ 우승자 송가인. ‘미스터 트롯’ 톱 3인 임영웅, 영탁, 이찬원. [TV캡처]

코로나19로 모든 것이 위축됐지만 유일하게 잘나가는 게 있다. 트로트다. 전통적 소비층이던 장노년층뿐 아니라 젊은 세대들까지 사로잡았다. 대표주자인 TV조선 오디션 프로 ‘미스터 트롯’은 시청률 35.7%로 종영된 후에도 여진이 세다. 임영웅, 영탁, 이찬원 등 톱3는 물론이고 출연자들까지 인기다. 젊은 트로트 스타들이 CF계를 누비고, TV에서는 한 채널 건너 트로트다. 음원사이트 지니뮤직에 따르면 지난 1월까지 1년간 ‘톱 차트 200’에 트로트가 진입한 횟수는 전년 동기 대비 5.8배 증가했다. 기껏해야 노래방 흥 띄우기용, 싸구려 취향, 어르신들의 전유물로 치부되던 트로트가 대중문화의 중심에 들어선 모양새다.
  

주변부 트로트 비주류 탈출
다세대가 함께 공명한 결과
서민적 장르, 생명력 입증
새 히트곡 나와야 진짜 성공

늙어가는 TV가 찾은 문화 트렌드
 
트로트 붐에는 TV가 주요한 역할을 했다. 지역축제 등 ‘행사’나 지역방송에 산발적으로 존재했던 트로트를 메인 흐름으로 끌어올렸다. 연일 젊은 시청자의 이탈로 늙어가는 TV가 트로트를 소재로 주시청층을 공략하고 나선 것이 붐의 시작이었다. 지난해 TV조선 ‘미스 트롯’을 필두로, KBS ‘아침마당-도전 꿈의 무대’ ‘노래가 좋아-트로트가 좋아’, MBC ‘놀면 뭐하니-뽕포유’, TV조선 ‘미스터 트롯’이 이어졌다. 이미지가 소진된 국민 MC 유재석이 신인 트로트 가수 ‘유산슬’ 캐릭터로 변신하며 활로를 찾았고 ‘미스터 트롯’은 트로트에 오디션, 퍼포먼스 등 젊은 감각을 더 해 폭발적 시청률을 올렸다.
 
코로나19 탓으로 ‘집콕’ 하는 상황도 ‘미스터 트롯’을 도왔다. 안 그래도 TV 시청 시간이 느는데 트로트가 다세대용 국민예능으로 낙점됐다. 문자투표에 익숙지 않은 장노년층의 참여로 결승전 770만 문자투표 중 200만표 이상이 무효 처리되기도 했다. 지금 TV에는 트로트 해외 버스킹 SBS ‘트롯신이 떴다’ 등 트로트 프로가 봇물이다. MBC ‘편애중계’ 등 일반 예능도 트로트 소재 일색이라 쏠림을 비판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다.
  
오팔세대의 문화 파워, 뉴트로
 
트로트 붐은 오팔(OPAL·Old People with Active Lives)세대의 문화적 파워를 보여준다. 오팔세대란 김난도 서울대 교수가 ‘2020 트렌드’의 하나로 지목한, 문화적 소비력이 왕성한 5060 신중년을 일컫는다. 2018년 서울시의 조사에서도 5060은 문화활동이 가장 활발한 연령대로 나타났다. 이들은 트로트 스타를 대상으로, 젊은 세대의 전유물로 알려진 ‘덕질’을 한다. 아이돌 팬들처럼 ‘스밍(스트리밍)’하고 ‘조공(물품 서포트)’도 한다. 송가인 팬클럽 ‘어게인’은 최근 미래통합당이 핑크를 대표색으로 정하자 자신들의 공식 색을 따라 했다며 항의하기도 했다. 주말이면 팬들이 1000명씩 송가인 고향 집(진도)을 찾는 덕에, 전남 진도군은 코로나19 종식 이후 운영할 ‘진도 시티투어’에 송가인 집을 포함할 계획이다. 임영웅, 이찬원은 아이돌 인기 척도인 지하철 광고까지 등장했다. 25일, 다음 팬카페 1위는 임영웅 공식 카페다.
 
유산슬

유산슬

트로트 붐은 유튜브 트로트 채널의 인기와도 밀접한데, 그만큼 장노년층 사이에 유튜브 컬처가 파고들었다는 의미다. 앱 분석업체 와이즈앱에 따르면 2019년 4월 한 달간 국내 전체 유튜브 사용 시간(388억분)의 26%를 50대 이상이 차지했다. 50대 이상 유튜브 사용 시간은 전년 같은 기간 대비 2배였다. 중장년층의 주된 음악 소비 채널이 유튜브가 됐고, 역으로 유튜브 활동만으로 ‘중통령(중년들의 대통령)’이 되는 트로트 가수들이 나왔다. 이처럼 유튜브를 중심으로 꾸준히 형성돼온 트로트 팬덤이 방송을 만나 폭발한 것이다. 음악평론가 서정민갑씨는 “선거와 소비에서 장노년층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듯 음악 시장에서도 마찬가지가 됐다”고 분석했다.
 
또 다른 축은 2030 뉴트로 열풍이다. 90년대 가요와 양준일을 재발견했듯, 트로트라는 새로운 문화적 보고를 찾아냈다. ‘미스터 트롯’ 서울 콘서트는 예매자의 43.4%가 20대였다. 장·노년을 위한 대리 예매를 감안하더라도 지난해 ‘미스 트롯’ 콘서트의 20대 예매자 23.4%에 비해 두 배쯤 늘었다. ‘미스터 트롯’ 미(美)인 대학생 이찬원의 팬은 10~30대에 집중 포진돼 있다. 여고생들이 이찬원의 정통 트로트에 맞춰 춤추는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젊은 팬 중에는 자신의 정체를 가리고 일부러 금례, 영자, 순이 등 예스러운 이름을 쓰면서 어르신인 양 활동하는 경우도 많다. 미국 밀레니얼 세대가 SNS에서 베이비부머 행세를 하는 ‘베이비부머 역할놀이’와도 비슷하다. ‘전금례’란 이름으로 이찬원 팬 유튜브 계정을 운영 중인 이용자는 한 인터뷰에서 “30대 여성 직장인”이라고 밝혔다. SNS에서 다양한 계정에 가명·익명으로 활동하며 여러 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멀티 페르소나’의 일환이다.
  
한과 흥, 서민의 음악
 
트로트 붐은 무엇보다 트로트라는 장르에 내재한 한(恨)과 흥, 서민성이라는 생명력을 되살렸다. ‘미스터 트롯’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심사위원인 트로트 가수 진성이 자신의 노래 ‘보릿고개’를 부르는 13세 정동원을 보며 눈물을 흘린 장면이다. “아야 뛰지 마라/배 꺼질라/가슴 시린 보릿고개길/ 주린 배 잡고 물 한 바가지 배 채우시던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라는 가사다. 유랑극단 출신으로 오랜 가난과 무명을 거쳐 비로소 지명도를 얻은 진성은 “어린 시절이 떠올라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정동원은 “보릿고개란 말을 몰라서 할아버지에게 배우며 불렀다”고 했다. 서민의 애환을 달래주며 세대 간 소통이 가능한 트로트의 본령이 잘 드러난 대목이다.
 
‘미스 트롯’ 때만 해도 전통적 여성상을 강조하는 가사와 ‘퇴폐 쇼’ 같은 분위기로 젊은 층의 거부감이 있었지만, ‘미스터 트롯’이 들려준 ‘남자 노래’들은 꾸밈없고 인생을 담은 생활밀착형 가사로 귀를 끌었다. 대학생 한유진(25)씨는 “5060 부모님과 같이 시청하면서 트로트를 새롭게 보게 됐다. 직설화법이 촌스럽지만 가식 없는 매력이 있어 유튜브로 원곡도 찾아본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무속인(송가인), 편모슬하의 어려운 삶(임영웅), 할아버지 손에 큰 손자(정동원) 등 출연자들이 사연 하나씩 있는 인물이란 점도 트로트의 서민성과 잘 맞아떨어졌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지금은 오디션 스타들에게 관심이 쏠려 있지만 개인 인기를 넘어 트로트 자체가 현재진행형 장르로 자리매김하려면 대형 신곡이 뒷받침해줘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특히 젊은 층은 트로트 자체보다 해당 가수가 좋아서 트로트에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다. 음악평론가 임진모씨는 “오랜 역사를 통해 증명된 트로트의 힘은 전 국민적이고 세대 포괄적이라는 데 있다. 압도적 기술 문명에 허우적거리는 사람들한테 고향 같은 음악이 트로트”라며 “일시적 유행을 넘어 진정한 열풍으로 번지려면 판을 전복할 만큼 큰 히트곡과 화제의 인물이 필요하다. 트로트에 다시 기회가 왔다”고 강조했다.
 
키워드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가 이끄는 ‘서울대 소비 트랜드 분석센터’가 펴낸 『트렌드 코리아 2020』에는 ‘오팔세대’와 ‘멀티 페르소나’가 올해 트렌드로 뽑혔다. ‘뉴트로’는 2019년 트렌드였다.
  
오팔(OPAL)세대
 
‘Old People with Active Lives’의 약자. 고령화 사회의 주축으로 떠오른 ‘액티브 시니어’를 지칭한다. 동시에 베이비부머를 대표하는 58년생 개띠의 ‘오팔’도 뜻한다. 2018년 ‘서울시민 문화향유 실태조사’에 따르면 50~60대의 문화관람률(1년에 한 번 이상 문화활동을 한 사람의 비율)이 모든 연령층 중에 가장 높았다(남성 77%, 여성 89%). 20대는 남성 66.3%, 여성 66%였다.
 
멀티 페르소나
 
페이스북·인스타그램·트위터 등 SNS 별로 정체성이 다르고, 하나의 SNS에서도 여러 계정(부계정, 뒷계정)을 쓰며 자기 모습을 바꾸는 ‘다중자아’ 개념. 글로벌웹인덱스의 시장조사 리포트에 따르면 인터넷 사용자 98% 이상이 SNS를 사용하며, 한 사람당 평균 계정 수는 7.6개였다. Z세대 이용자들은 보통 인스타그램 계정을 두 개 이상 갖고 있는데, 진짜 계정에는 과장과 거짓이, 가짜 계정에 오히려 현실이 드러나는 경향이 발견된다.
  
뉴트로(New-tro)
 
중장년층의 향수를 건드리는 레트로(Retro)와 달리, 과거를 모르는 1020 세대에게 옛것의 신선함으로 어필하는 새로운 복고.
 
양성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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