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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착한 정책

중앙일보 2020.03.26 00:23 종합 33면 지면보기
한애란 금융팀장

한애란 금융팀장

대기업 전직 임원이 들려준 20년쯤 전의 이야기다. 그 기업 회장님은 한마디로 ‘착한 회장님’이었다. 그는 직원들이 밤 늦게 야근하는 걸 싫어했다. ‘왜 직원들 힘들게 늦게까지 일을 시키냐. 일찍 퇴근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회장님 눈치 때문에 본사 부서장들은 퇴근시간이 되면 얼른 직원들을 내보냈다. 물론 실제로는 직원들이 퇴근하는 척 사무실 불을 끄고 나갔다가 다시 회사로 돌아와 야근을 한 경우가 적지 않았지만 말이다.
 
회장님은 직원들이 먹고살기 충분한 월급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회장님이 직원들을 불러 면담을 하겠다고 했다. 월급은 얼마 받는지, 그걸로 먹고살 만한지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총무부장이던 그 임원은 직원들에게 지침을 내렸다. “회장님한테는 월급 ○○○만원 받는다고 얘기해.”
 
이 이야기 주인공은 정몽근 현대백화점그룹 명예회장이다. 오래 전 이야기가 떠오른 건 얼마 전 나온 현대백화점 관련 소식 때문이다. 정 명예회장의 장남인 정지선 회장의 제안으로 매출이 급감한 백화점 입점 협력사 매니저 3000명에 100만원씩 총 30억원을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유통업계가 휘청거리는 와중에 임직원뿐 아니라 협력사까지 챙긴 착한 경영 사례다.
 
코로나19로 다들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상생과 나눔의 착한 경영, 착한 정책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정부가 내놓은 게 이거다. 장·차관 월급 30% 반납.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고통을 나누겠다는 취지다. 대통령을 포함한 행정부 고위 공무원이 나서자 이에 호응해 지방자치단체장과 공기업 임원까지 동참하기 시작했다.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무언가를 추가로 나눠주는 게 아니라 줬던 것을 빼앗는 것도 착한 정책일까. 장·차관이 월급을 덜 받아서 국민들이 얻는 건 무엇일까. ‘고위층이 서민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이해해주겠구나’라는 마음의 위안? 오히려 이 정책으로 무언가를 얻는 건 정부 쪽이다. 가뭄이 들면 ‘수라상 반찬 가짓수를 줄이라’ 명했던 조선시대 성군 같은 이미지는 얻을 테니 말이다.
 
일괄적인 월급 반납이 아니라, 고위 공무원의 자발적인 기부 형식으로 나눔을 실천했으면 어땠을까. 손에 잡히는 착한 정책이 필요하다.
 
한애란 금융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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