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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믿는 '저유가=경제호재'···코로나는 이 공식마저 깼다

중앙일보 2020.03.25 16:11
압둘 라지즈 빈 살만 사우디 에너지부 장관(가운데)과 알렉산드르 노박 러시아 에너지부 장관(오른쪽)이 지난해 12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OPEC+ 회의에서 논의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압둘 라지즈 빈 살만 사우디 에너지부 장관(가운데)과 알렉산드르 노박 러시아 에너지부 장관(오른쪽)이 지난해 12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OPEC+ 회의에서 논의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역대급 저(低)유가마저 꽁꽁 얼어붙은 우리 경제를 녹이지 못하고 있다.원유 수입국인 한국과 같은 나라에 통하던 '저유가 = 경제 호재’ 공식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사태에선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디플레이션(경기 침체와 맞물린 지속적 물가 하락)을 부추기는 불쏘시개로 작용할 거란 전망까지 나온다.

[뉴스분석]

 
24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5월 인도분 미국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는 배럴당 24.01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1월 2일 종가(배럴당 61.18달러)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지난 18일엔 배럴당 20.37달러를 기록해 20달러 선마저 위협했다. 로이터는 “2002년 2월 이후 약 18년 만의 최저 수준”이라며 “역대 3번째 최악의 날”이라고 분석했다.

바닥 찍은 국제유가.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바닥 찍은 국제유가.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원유를 100% 수입하는 한국 경제에 가장 바람직한 유가 그래프는 유가가 배럴당 60~80달러 수준에서 점진적으로 오르내리는 상황이다. 현재는 하단을 한참 벗어났다. 종류와 채굴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생산 원가만 따져도 유가가 배럴당 20~30달러는 돼야 채산성이 있다. 미국 셰일가스 업계의 경우 배럴당 50달러는 돼야 수지가 맞는다. 윤창현 산업통상자원부 석유산업과장은 “현재 유가 수준이 원가에도 못 미치는 ‘비정상’이라는 건 분명하다”며 “저유가가 장기화할 경우 부채 비율이 높은 미국 셰일가스 업계가 줄도산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저유가 추세는 한동안 쉽게 꺾이지 않을 전망이다. 중동 산유국의 맹주인 사우디와 자원 부국 러시아가 증산 경쟁을 벌이며 ‘치킨 게임’에 들어가서다. 배경에는 1위 산유국인 미국의 셰일가스 업계를 견제하려는 계산이 깔려있다. 조영화 한국석유공사 석유동향팀장은 “경제 위기를 맞은 미국마저 양국의 치킨 게임에 브레이크를 걸 수단이 마땅치 않아 유가 바닥을 가늠할 수 없다”며 “산유국의 감산 움직임이 나오고 신종 코로나가 수그러들려면 상반기 중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보통 저유가는 원유 100% 수입국인 우리에게 호재로 작용한다. 유가가 내리면 원재료 값ㆍ물류비가 줄어 기업 투자를 늘린다. 기름값뿐 아니라 유가에 연동한 생활물가가 따라 내리면서 가계에 소비 여력이 생긴다. 하지만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진단이 나온다. 석유 수요를 크게 위축시킨 신종 코로나 변수 때문이다.

 
골드만삭스는 각국 정부가 신종 코로나 확산을 잠재우기 위해 경제활동을 위축시키면서 하루 800만 배럴의 석유 수요가 줄어들 것으로 예측했다. 전 세계 하루 소비량(1억 배럴)의 8%가 감소할 수 있다는 얘기다. 올해 연간 석유 수요 감소가 현실화하면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처음이다. 저유가가 수요를 창출하는 경제 선순환의 고리가 끊길 수 있다. 신종 코로나 변수를 제외하고라도 과거 대비 세계 경제의 석유집약도(석유투입량/국내총생산)가 낮아졌다. 저금리 추세가 장기화하면서 유가 하락분이 물가 인하로 예전만큼 이어지지 않는 추세다.
 
이달석 에너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신종 코로나 확산 와중에 저유가를 “음(陰)의 부작용이 양(陽)의 선순환을 먹어치웠다”고 진단했다. 그의 진단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과거 저유가 수혜를 입은 대표 업종이 신종 코로나 사태에서 가장 피해를 보고 있다. 항공업이라든지, 운수업, 자동차 업종이 대표적이다. 글로벌 이동이 끊기면서 이쪽 산업으로 갔던 저유가 혜택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반대로 저유가로 피해를 보는 정유ㆍ화학 같은 업종의 피해가 두드러진다. 이런 상황에선 저유가가 경제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가 예상보다 훨씬 적게 나타나는 것만은 분명하다.”

 
유가 급락 시 브라질ㆍ베네수엘라 같은 중남미 산유국 경기가 타격을 입는 것도 악재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우리의 경우 대외 변수에 취약한 신흥국 경기가 나빠질 경우 수출에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지난해 신흥국이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3%에 달한다. 디플레이션 우려도 고개를 든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 0%대를 예상하는데 실물ㆍ금융이 복합 위기를 맞은 상황에 저유가까지 덮치면서 디플레이션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며 “저유가의 과실이 적거나 아예 없을 수 있다”고 진단했다.

 
저유가 장기화 추세에 대비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김상봉 교수는 “직격탄을 맞은 정유ㆍ화학업계가 소나기에 버틸 수 있도록 ‘우산’부터 마련하고 디플레이션으로 빠지지 않도록 경제 대책으로 보강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조영화 석유공사 팀장은 “골이 깊으면 산도 높다는 말을 에너지 수입국 입장에서 새겨들을 만하다”며 “에너지 안보 측면에서 국가 비축유 개념으로 원유를 싼값에 대량 확보하고 MB 정부 이후 위축된 해외 자원 탐사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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