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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무기징역 가능 아동 성착취···대법 ‘최고 9년이상’ 제시

중앙일보 2020.03.25 05:00
‘SNS에서 알게 된 14세 여아에게 카메라 앞에서 자위행위를 하게 하고 그 장면을 녹화한 피고인이 있다. 이 범죄사실에 대해 가장 타당한 형을 선택하여 주십시오.’

 
‘보기: ①2년 6월, ②3년, ③3년 6월, … ⑩9년 이상

 
얼마 전 판사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설문조사의 한 문항이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지난 4~13일 1심 판사들을 대상으로 아동ㆍ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아청법) 11조에 대해 적절한 양형이 얼마인지 묻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를 검토한 뒤 양형 기준을 만드는 데 반영하기 위해서다.

 

"제시된 형량 너무 낮아" 의문 표한 판사들

아동 성범죄

아동 성범죄

그런데 24일 중앙일보 취재에 따르면 이 설문 조사를 두고 일부 판사들 사이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조사 문항은 아동 음란물 제작ㆍ영리 목적 판매ㆍ유포ㆍ소지 사례를 각각 주고 판사들이 객관식으로 형을 선택하게 했다. 그런데 선택지로 제시된 형량이 대체로 낮다는 지적이 나온다.

 
예컨대 앞서 제시된 사례는 아동 음란물 제작 범죄에 해당한다. 법정형은 최소 5년 이상의 징역 또는 무기징역까지도 처하도록 규정한다. 그런데 제시된 10개의 선택지 중 5개가 5년 미만의 형이었다. 특별한 사정이 있을 경우 법관의 재량에 따라 법정 최소형보다도 낮게 선고할 수 있는데, 보기의 절반을 그렇게 채운 것이다.

 

가중은 1년인데 감경은 3년?

나머지 선택지도 9년 미만의 형을 1년 단위로 잘게 쪼개어서 제시했고, 마지막 선택지인 최고형은 ‘9년 이상’으로 뭉뚱그려 제시했다. 한 현직 판사는 이에 대해 “모든 판사가 모든 문항의 답을 전부 최고형으로 찍지 않는 이상 중간 즈음에서 평균값이 나올 가능성이 큰데 이러면 판사들이 아동 성 착취 범죄를 중하게 다스리지 않는다는 잘못된 인식을 줄 수도 있고, 양형 기준 자체가 낮게 설정될 위험도 있다”고 말했다.

 
형 가중과 감경 사례가 적절치 못하다는 비판도 있었다. 범죄 과정에서 ‘신체와 정신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는 피해자의 사례에서 설문이 제시한 최고형은 10년 이상이었다. 반면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 경우는 최고형을 6년 이상으로 제시했다. 9년을 기준으로 가중 사례는 최고형이 1년 늘어난 반면, 감경 사례는 3년을 깎은 것이다.

 
한 판사는 “성 착취 아동들이 가족이나 경제적 문제로 처벌불원서를 내도록 강요받는 경우가 많아서 처벌 불원을 양형 감경 인자로 삼는 것 자체에 대해 비판이 많은 상황”이라며 “이를 3년이나 낮춰서 처벌하도록 선택지를 제시한 건 문제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아동 음란물 판매'는 죄다 3년 이하

아동성범죄

아동성범죄

다른 문항도 제시된 형이 낮다는 지적이 나왔다. 아동 음란물을 영리 목적으로 판매한 사례의 경우 제시된 최소형이 4월 이하, 최고형은 3년 이상이었다. 이 경우 법정형이 10년 이하인데도 90%의 선택지가 3년 미만에서 형을 골라야 했다. 아동 음란물 배포 역시 선택지의 최소형이 2월 이하, 최고형이 3년 이상이었다.
 
이를 두고 대법원의 인식이 사회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김수정 변호사(법무법인 지향)는 “만일 이대로 설문이 진행됐다면 대법원이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설문지를 만든 것 같다”며 “아동 성 착취 범죄로 인한 피해가 엄청난데도 이를 일반 디지털 성범죄와 구분하지 못하는 기존 관점을 그대로 이어간 것”이라고 지적했다.
 

n번방 떠들썩한데…"법원이 사회 변화 못 따라가"

‘n번방’ 사건의 핵심 피의자인 일명 ‘박사’로 지목되는 조모씨 [뉴스1]

‘n번방’ 사건의 핵심 피의자인 일명 ‘박사’로 지목되는 조모씨 [뉴스1]

최근 미성년자 성착취 영상을 텔레그램에 유포한 이른바 ‘n번방 사건’이 논란인 가운데, 한국은 아청법과 관련해 실제 내려지는 형이 지나치게 가볍다는 비판이 나온다. 지난해 10월 세계 최대 아동음란물 웹사이트 ‘웰컴 투 비디오’가 적발된 사건에서 미국 법원은 이용자에게 최대 징역 15년을, 영국은 22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한국인 운영자 손모씨는 국내 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설문 조사에 대해 크게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는 의견도 있었다. 서울의 한 판사는 “판결이라는 게 양 극단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법정 최고형에 가까운 선택지를 꼭 많이 넣을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다른 판사는 “현재 판결이 어느 정도 수준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물어본 것이고 실제 양형 기준은 여러 자료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만들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대법원은 “설문조사는 내부 검토용 자료로 분석 중이며 설문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하기 곤란하다”고 밝혔다.
 
박사라ㆍ이수정 기자 park.sar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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