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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처용 아내를 탐한 역신, 정체모를 바이러스의 화신?

중앙일보 2020.03.20 07:00

[더,오래] 권도영의 구비구비옛이야기(55)

 
말 그대로 역병이 창궐하는 시대이다. 우리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자가격리와 재택근무 등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중이다. 학교들은 개학을 연기하였고, 대학은 2주 개강 연기에 2주 온라인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최소한 3월 한 달은 거의 모든 강의, 공연, 모임 일정들이 취소되었고, 사람들은 집밥 삼식이의 늪에서 새삼스럽게 일상에 대해 성찰하는 중이다. 사스나 메르스 등을 떠올리면서 금세 잡힐 것이라고 낙관하기도 하였지만, 폭발적인 전염력이 사람들을 긴장시키고 있고, 각 사회는 각자 구축하고 있는 시스템의 작동에 따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문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대중문화 콘텐츠에서도 바이러스는 흥미로운 소재를 넘어 우리 사는 세상을 조망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되고 있다. 스트리밍 서비스로 제공되는 드라마에서는 조선시대에 좀비가 창궐한다. 좀비 캐릭터도 어떤 면에서는 바이러스와 통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어디에선가 불쑥 나타나고, 그 정체를 도통 알 수가 없으며, 접촉하는 즉시 그 인간은 숙주가 되고, 그와 접촉하는 자는 또한 좀비가 된다. 어디엔가 있었던 것이, 어느 순간 나타나서, 인간들이 허둥지둥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인간 세상을 헤집어 놓는 것이 좀비이다. 떼로 나타나고, 피에 굶주려 있으며, 예측불허의 패턴을 보인다.
 
인류에게 핵무기와 같은 물질적, 물리적 힘보다 아예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가 도통 대응 방법을 찾기가 힘든 위협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사진 Pixabay]

인류에게 핵무기와 같은 물질적, 물리적 힘보다 아예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가 도통 대응 방법을 찾기가 힘든 위협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사진 Pixabay]

 
한때는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인류의 암울한 미래는 핵무기로 인해 도래하곤 하였다. 핵전쟁으로 인해 초토화된, 지구 멸망의 시대가 인류의 디스토피아로 그려지면서 사람들은 기술 발전의 폐해 등을 흔히 논하곤 하였다. 이제는 더이상 핵무기로 인한 디스토피아는 그려지지 않는 것 같다. 우주 전쟁도 어째 좀 뜸하고, 대신 아주 고독하게 우주에 맞서 인간의 삶을 이어가려는 고군분투를 그리거나, 좀비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는 인류를 그려내기도 한다. 분명 시사하는 바가 있는 변화이다. 인류에게 핵무기와 같은 물질적, 물리적 힘보다 아예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가 도통 대응 방법을 찾기가 힘든 위협이 되고 있는 것이다.
 
역(疫)이란, 돌림병을 뜻하기도 하지만, 돌림병을 유발시키는 귀신을 뜻하기도 한다. 역(疫)은 병에만 머무르지 않고 신(神)의 경지에 이른다. 그런데 그 신은 우리에게 꽤 친숙하다. 교과서에서 흔히 다루어왔던 ‘처용가(處容歌)’에서 그 실체를 볼 수 있다.
 
서울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니다가/들어와 잠자리를 보니/가랑이가 넷이도다./둘은 나의 것이었고/둘은 누구의 것인가?/본디 내 것이지마는/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오?”
 
신라 제49대 왕인 헌강왕이 지금의 울산에 나가 물가에서 쉬는데 구름과 안개에 갇혀 길을 잃었다. 동해 용의 조화 때문인 것을 알고 근처에 용을 위한 절을 세우라고 명령하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 그러고 나니 동해 용이 기뻐하며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나타나 왕의 덕을 찬양하며 춤을 추었다. 동해 용의 일곱 아들 중 하나가 왕을 따라가서 정사(政事)를 도왔는데 그가 처용이다. 왕은 그를 잡아두기 위해 어여쁜 아내와 급간(級干) 벼슬을 주었다.
그런데 처용의 어여쁜 아내를 역신(疫神)이 탐하여, 처용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밤에 그의 집에 가서 몰래 같이 잤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나자 역신은 모습을 나타내고 처용 앞에 꿇어앉았다. 남의 아내를 사모하여 범하였음에도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은 처용의 태도에 감동한 역신은 앞으로 처용의 모습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근처에 얼씬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그려 대문에 붙였다.
 
〈처용가〉의 배경설화를 다시 들여다보니, 그 주고받음에 시선이 멈춘다. 본래 용은 심심하면 조화를 부린다. 변화무쌍하고 예측불가한 바다의 성질을 그렇게 조화 부리는 용으로 나타내었을 것이다. 그 조화를 잠재우는 방식은 절을 세워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종교의 힘에 의지했다고 흔히 풀이할 것이나, 그 행위 깊은 곳에는 변화무쌍하고 예측불가한 대상을 대하는 인간의 겸허한 자세가 깔려 있다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 우리를 괴롭힌다고 해서 무작정 칼 들고 나가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성난 심사를 달래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헌강왕이 동해 용에게 보인 이 태도는 관용으로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고, 차라리 겸허함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한 태도에 동해 용은 감복하였다. 그리고 기꺼이 자신의 아들 중 하나가 왕을 따라가는 데에 동의하였다. 왕이 동해 용의 아들, 처용을 위해 혼사를 주선하고 벼슬을 내렸다는 것에서는 헌강왕의 관용도 있겠지만, 처용이 그만큼 성심으로 일하면서 능력을 보였다는 상황을 짐작해 볼 수도 있겠다. 그러한 오고감의 차원을 충분히 이해했을 때, 그 이후 처용이 역신을 만나게 되는 상황의 맥락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악학궤범』에 수록된 처용탈의 모습. [사진 신라속의 사랑 사랑속의 신라]

『악학궤범』에 수록된 처용탈의 모습. [사진 신라속의 사랑 사랑속의 신라]

 
처용은 달 밝은 밤을 신나게 즐기다가 귀가하였다. 아내를 혼자 두고 깊은 밤까지 놀았으니 처용도 할 말은 없는 상황이긴 하다. 무책임한 남편이다. 벼슬이 있고 왕의 신임을 받는 중요한 인물일지라도 여흥을 즐기기 위한 시간은 필요한다고 항변할 수 있으려나. 잠시 자신의 본분이나 집에 혼자 있는 아내를 잊은 대가는 역신의 침입이라는 사건으로 이어졌다. 신격이 모습을 바꾸어 인간을 범하는 일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도 흔히 등장한다. 주로 인간이 방심했을 때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고, 혹은 신이 인간을 혼내주기 위해서 이렇게 등장하기도 한다. 처용의 아내를 범한 역신처럼 그들 자신의 욕망에 의해 인간을 범하는 방식으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처용도 이 인물을 처음 만났을 때 우선 그 정체 없음에 놀랐다. “둘은 나의 것이고, 둘은 누구의 것인가?” 역신은 정체가 모호하다. 신인데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여 나타났으니 본래 모습을 감춘 상태였고,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등장하였고, 평소에 보지 못하던 것이었으니 또한 그 정체를 알 길이 없었다.
 
지금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바이러스는 옛날 식으로 표현하자면 역신이다. 역병은 신격의 위치에서 다루어졌다. 바이러스가 신이라니. 그런데 가만 놓고 생각해 보니 처용이 처음 역신의 가랑이를 보고 이게 대체 누구 것이냐, 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주변에 떠다니고 있는 이 바이러스에 대해서 무엇인지 알 길이 없어 아예 이름부터가 ‘신종’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야 본래 박쥐 등에 존재하던 것이라고 하지만, 지금 떠다니고 있는 이 코로나 바이러스는 새로 등장한 종류여서 실체 파악이 어렵다. 한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바이러스는 걷잡을 수 없이 퍼져 간다. 하루에도 수백 명의 확진자가 발표되고, 이로 인해 사망에 이르는 이들의 숫자가 상상을 초월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살고 있던 세상, 우리의 하루하루 일상에 대해서 사람들은 새삼스럽게 느끼기 시작했다. 다함께 잘 살아내기 위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인지를 두루두루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사진 Pixabay]

우리가 살고 있던 세상, 우리의 하루하루 일상에 대해서 사람들은 새삼스럽게 느끼기 시작했다. 다함께 잘 살아내기 위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인지를 두루두루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사진 Pixabay]

 
그 자신의 정체 없음을 지나 이 역(疫)은 우리로 하여금 그동안 알지 못했던 쪽에 눈길을 돌리게 만들었다. 그가 세상에 나타나자 한 종교 집단의 존재가 드러났고, 집단 수용 시설의 실태가 알려졌으며, 가까운 사람들과의 친목도 막혀 버렸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길거리에 나서면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를 받았고, 발생지로 알려진 지역 출신 사람들은 타 지역에서 그 자체로 바이러스 취급을 받았다. 우리가 살고 있던 세상, 우리의 하루하루 일상에 대해서 사람들은 새삼스럽게 느끼기 시작했다. 성찰이 이루어져야 할 중요한 시점이다.
 
역신의 정체 없음, 정체를 알 수 없음에 시선이 꽂혀 이런 저런 생각들을 풀어 보았다. 최종적으로 처용은 “둘은 내것이나 둘은 누구 것인가” 하면서 춤을 추며 노래하였다. 그 알 수 없는 대상에 맞서서 싸우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우리가 싸우지도 말고 그저 춤추고 노래하자고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처용의 ‘춤추고 노래함’이라는 것은 전후좌우 맥락을 모두 파악하였기에 가능한 관조(觀照)이기도 하다는 점에 주목해 본다. 처용은 최소한 불안과 공포에 짓눌리진 않았다. 자신을 보고도 두려워 떨지 않는 모습을 보았기에 역신은 물러갈 수 있었다. 그저 패배를 시인하는 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처용의 경지를 인정하고 기꺼이 그에게 머리를 숙이겠다고 다짐하였다. 정체를 알 수 없던 역신이 등장했다고 해서 우리는 마스크 한 장에 목숨 걸고 낫 들고 우리끼리 싸울 것이 아니라, 그 역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차분하게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가 무엇인지, 다함께 잘 살아내기 위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인지를 두루두루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역(疫)은 세상에서 완벽하게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다. 언제든 우리 주변에 머물러 있다. 그는 언제든 모습을 드러낼 것인데, 그랬다가도 금세 물러가도록 할 만한 처용의 그림 같은 역할은 무엇이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건국대학교 서사와문학치료연구소 연구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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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도영 권도영 건국대학교 서사와문학치료연구소 필진

[권도영의 구비구비 옛이야기] 우리 옛이야기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 신화, 전설, 민담에는 현대에도 적용 가능한 인간관계의 진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관계에서 생기는 갈등은 어느 무엇보다도 우리를 지치게 한다. 나 하나를 둘러싼 인간관계는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의 갈등을 심도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가 옛이야기이다. 우리 옛이야기를 통해 내 안에 숨어 있는 치유의 힘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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