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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현의 철학이 삶을 묻다] 욕망과 기개의 절제로 성취되는 행복과 정의

중앙일보 2020.03.20 00:17 종합 26면 지면보기

이성을 삶의 지휘대에 올린 플라톤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삶을 비이성적 검은 말과 이성적 흰 말을 몰며 진리를 향하는 마부에 비유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삶을 비이성적 검은 말과 이성적 흰 말을 몰며 진리를 향하는 마부에 비유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변화무쌍한 자연 앞에 무력한 원시의 인간들은 나무·돌과 같은 자연물에 마음을 부여하여 대화하고자 했고(애니미즘), 때론 주술적 종교를 통하여 재난을 헤쳐 나가려 했다. 문명이 시작된 그리스에서는 비록 자신의 환경에 스토리를 부여하는 단계까지 도달하였지만, 여전히 인간은 주인공이 아니었다. 신들이 대결을 벌이는 장엄한 서사에서 인간은 무대의 조연 정도의 역할을 하는 신화적 세계관이 지배하고 있었다. 개인의 삶과 행복은 여전히 나의 손을 떠나 운명에 달린 복권과 같은 것이었다.
 

욕망·기개·이성으로 3분된 영혼
이득 좇는 욕망은 파멸 이르게하고
맹목적 분노는 자신을 부끄럽게해
이성 통한 절제가 행복한 삶의 통로
각자 본분 다해야 정의 사회 실현돼

이러한 생각은 언어에도 반영돼 있다. 행복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happiness의 hap은 우연히 발생한 일을, 독일어 Glücklickeit의 Glück와 불어 bonheur의 heur는 모두 행운을 의미한다.
  
신의 이야기에서 인간의 이야기로
 
그리스 철학과 더불어 인간이 스스로 좋은 삶을 일궈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나고, 신의 이야기(미토스 μῦθος) 시대는 인간의 이야기(로고스 λόγος) 시대에 자리를 넘겨준다. 변화무쌍한 감각과 욕망 너머에 진리와 옳음에 대한 불변의 원리가 있음을 믿고, 진리를 깨달으며 스스로를 다스려 삶을 가꾸어 나갈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다.
 
자신감이 소크라테스에게서 선명한 모습을 보인다. 그는 ‘영혼을 돌보는 것’이 삶의 목표임을 제자들에게 설파하였다. 또 “성찰되지 않은 삶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며 다른 철학자들과 좋은 삶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끊임없이 논쟁했다. 좋은 삶은 성찰하며 영혼을 돌보는 데에 있다는 가르침인데, 소크라테스의 충실한 제자였던 플라톤은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그 의미를 탐구한다. 마침내 성찰적 이성을 중심으로 한 철학을 과감하고도 장엄하게 제시하여 서양철학의 역사에 깊고 넓은 영향을 남긴다. “서양철학은 플라톤 철학에 대한 주석의 역사”라고 한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말은 플라톤의 영향력을 짐작하게 한다.
  
셋으로 나뉜 영혼
 
영혼을 잘 돌보기 위해서는 우선 잘 이해해야 하겠다. 플라톤은 영혼을 세 부분으로 구분한다. 첫째는 돈과 이득을 추구하는 욕망의 부분이다.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부분이고, 플라톤도 이 부분을 가볍게 보지 않는다. 둘째는 명예를 사랑하는 부분으로 기개의 영역이다. 우리는 남에게 지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옳지 않은 일을 보면 화를 낸다. 셋째는 지혜를 사랑하는 부분이다. 인간은 진리에 대한 욕구를 갖고 있으며, 어떤 목적을 이루고자 할 경우에는 그를 성취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가를 궁리한다. 이성이 이 부분을 담당한다.
 
오늘의 철학자들이 영혼 삼분설이라 이름 붙인 이 입장을 플라톤은 신체의 세 부분인 배, 가슴, 머리와 대응하여 설명한다. 우리는 무언가를 먹고 싶은 욕망이 생길 때 배를 만진다. 분통 터질 때는 가슴을 치고, 어떤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을 때 머리를 괸다. 플라톤의 비유가 그럴듯하다.
 
영혼처럼 국가도 셋으로 나눈다. 플라톤이 제시하는 국가 형성의 시나리오는 현실적이고 경제적이다. 개인들은 자신이 잘 만들어 충분히 갖고 있는 것을 교환하여 서로가 필요한 물품을 효율적으로 얻기 위하여 모인다. 이렇게 기초적 필요를 공급하는 사회의 초석으로 생산자 계층이 자리 잡는다. 사회가 더 복잡하게 발전하면 공동체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군사 계급이 필요하다. 기개가 뛰어난 사람들이 이 역할을 담당한다. 다음으로는 생산과 안보를 조율하며 전체 사회를 안정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한 지도자 계급이 필요하며, 이는 이성이 탁월한 사람들이 담당한다.
 
조화로서의 행복과 정의
 
아테네 학술원의 입구에 있는 소크라테스(왼쪽)와 플라톤의 동상. [사진 위키피디아]

아테네 학술원의 입구에 있는 소크라테스(왼쪽)와 플라톤의 동상. [사진 위키피디아]

영혼의 세 부분, 그에 대응하는 국가의 세 계급을 이야기한 후에 플라톤은 행복한 영혼과 정의로운 국가는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는가를 찾아간다. 질서(kosmos)와 조화가 그의 처방에서 키워드다. 플라톤은 그리스 사회가 평화로운 전성기를 지나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혼란기로 접어든 때 태어났다. 평온했던 과거를 그리워하였고, 이 향수가 그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영혼을 이루는 세 부분 사이에 조화가 없어서는 좋은 삶이 꾸려질 수 없다. 세 부분이 서로 주도권을 가지려고 충돌하는 영혼은 지리멸렬한 상태에 머물러 평화를 유지하지 못한다. 누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 욕망은 자신에게 좋은 것처럼 느껴지는 이득을 좇지만 결국 자신을 파멸의 길로 이르게 할 수 있고, 기개는 명예로워 보이는 것을 따라가지만, 분노에 맹목적으로 따를 때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들 수 있다. 이성이 지휘해야 한다. 무엇이 좋은 삶인가를 성찰하는 이성을 통하여 욕망과 기개를 절제할 때 좋은 삶, 행복한 삶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이다.
 
플라톤의 국가관에도 조화가 중심에 있다. 진리와 옳음에 대한 성찰을 주도하는 지도자 계급이 지휘하고, 생산자 계급은 공동체를 위한 필요 물품을 생산 공급하고, 군사 계급은 사회의 안전을 지키는 일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 각 계급이 자신의 본분의 영역을 담당하며 남의 영역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플라톤이 그리는 정의로운 사회의 모습이다.
 
이성으로 욕망과 혈기를 통제하며 살라는 말은 당연한 말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도처에 전쟁과 살육이 횡행하여 하루하루의 생존이 급박하던 시대에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랍다. 그건 그렇고 2400년이 지난 지금, 놀랍던 이야기가 상식처럼 돼 있는 지금, 우리는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로고스
오늘날 흔히 이성으로 번역되는 로고스는 여러 의미로 쓰였다. 때론 물리계(physis φύσις)와 인륜의 세계(nomos νόμος)를 지배하는 불변의 보편적 원리를, 때론 그를 파악하기 위하여 성찰하며 따지는 논증을, 때론 인간의 언어를 의미하기도 했다.

탐욕의 시대, 플라톤이 던지는 질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너도나도 행복하기 위해 산다고 말한다. 행복은 삶의 이정표라서 한 시대에서 무엇을 행복이라고 하는가를 보면, 그 시대를 지배하는 세계관을 알 수 있다. 오늘의 시대를 지배하는 행복관은 감각적이다. 국어대사전은 행복을 ‘삶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껴 흐뭇한 상태’로 정의한다. 대영 사전의 정의도 비슷하다. 플라톤도 자신의 시대를 돈과 이득을 추구하는 탐욕의 시대로 보며 처방을 제시했다. 절제되지 않은 욕망을 맹목적으로 따라 때로는 파멸로 이르는 요동치는 삶을 추구할 것인지,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가를 성찰하고 이성에 의하여 조율된 평정한 삶을 추구할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행복이라 부를지를 플라톤은 물었고, 지금도 묻고 있다.
 
사회 비전을 지도자가 독점하는 플라톤의 국가관은 주권이 국민에 있다는 오늘의 생각과 충돌한다. 지도자와 군인에게 초인적 양육과 교육을 부과하고, 사적 이익에 얽매이지 않도록 사생활과 사유재산을 박탈하여 권한보다 오히려 희생을 더 크게 만들었지만, 이런 처방은 오늘의 자유권과 충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혜·명예·욕망이라는 다양한 사회적 자산들을 서로 존중하며, 지도자는 불편부당한 성찰로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고, 군인과 생산계급은 각기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여 사회적 조화에 기여한다는 플라톤의 아이디어는 오늘에도 새겨볼 만하다. 마치 오케스트라에서 지휘자·현악·관악이 서로를 인정하고 화합하여 최상의 연주를 만들어 내듯이. 이전투구에서의 생존능력이 정치인의 덕목이고, 돈 버는 데 더 도움이 되는 지식이 더 높이 평가되고, 돈을 더 많이 버는 운동선수가 더 큰 명예를 얻고 있다. 욕망이 지혜와 용기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탐욕의 사회가 과연 우리가 원하는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인지 플라톤은 묻는다.
 
김기현 서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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