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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친형제 같은 남궁원·윤일봉 “카메라 앞에서 죽겠다”

중앙일보 2020.03.20 00:12 종합 24면 지면보기
2007년 대종상 영화제에서 영화발전 공로상을 받은 원로배우 신영균.(왼쪽) 후배 연기자 윤일봉(가운데)과 남궁원이 축하하고 있다. [뉴시스]

2007년 대종상 영화제에서 영화발전 공로상을 받은 원로배우 신영균.(왼쪽) 후배 연기자 윤일봉(가운데)과 남궁원이 축하하고 있다. [뉴시스]

코로나19 사태로 세상이 혼란스럽다. 내 나이 아흔둘, 지금껏 전혀 겪어보지 못한 재난이다. 고령 때문인지 주변에서 걱정을 많이 해준다. 며칠 전 배우 윤일봉에게 전화가 왔다. “형님, 괜찮으시죠. 하기야, 저보다 더 건강하시니…. 100세도 거뜬하실 것 같습니다.” “고마워요. 아우님도 늘 조심하세요.”
 

빨간 마후라, 후회 없이 살았다 - 제132화(7665)
<36> 한국영화의 산증인들

자기관리 철저한 노력파 남궁원
‘한국의 그레고리 펙’ 꽃미남 원조

중학생 때 데뷔한 의리파 윤일봉
유동근·엄태웅 등 연예인 명문가

윤일봉 하면 남궁원이 바로 떠오른다. 남궁원은 요즘 몸이 좋지 않아 바깥나들이가 쉽지 않다. 그래서 종종 내가 먼저 안부를 묻는다. “부인도 잘 지내고 있죠. 언제 한번 두 분이 함께 나오세요. 점심 대접을 할게요.” “예. 감사합니다. 맛난 것으로 사주세요.”
 
남궁원과 윤일봉. 올해 여든여섯, 1934년생 동갑내기다. 두 배우에게는 똑같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충무로의 살아 있는 전설’ ‘한국영화의 산증인’이다. 물론 내게도 통용되는 말이다. 한때 충무로를 제집처럼 휘저었던 ‘사나이 3인방’이라 할 수 있다. 이제 60~70년대 한국영화를 증언할 배우도 우리 셋만 남았다.
 
두 배우와는 지금까지 쭉 친형제처럼 지내왔다. 둘 다 나보다 먼저 충무로에 들어왔지만 여섯 살 많은 내가 형님 대접을 받아왔다. 나 또한 격의 없이 대해왔다. 노년을 함께할 친구가 있다는 건 크나큰 축복이다.
 
2007년 6월 대종상 영화제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꽃다발을 들고나온 두 후배가 영화발전공로상을 받은 나를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2014년 12월도 잊을 수 없다. 당시 영화인총연합회 이사장인 남궁원이 영화배우협회·영화인원로회와 함께 내게 도예가 조규영씨가 특별 제작한 백자를 헌정했다. 전 영화인의 긍지를 높여줬다는 뜻에서다. 백자에 새긴 ‘금세기 최고의 배우이자 최고의 경영인’ 문구가 지금도 뭉클하다.
 
남궁원은 무엇보다 시원스런 외모가 매력적이다. 180㎝ 넘는 훤칠한 키에 서구적 마스크로 ‘한국의 그레고리 펙’이란 별명이 붙었다. 요즘으로 치면 꽃미남의 원조쯤 된다. 나와 ‘빨간 마후라’(1964) ‘남과 북’(1965) 등에서 함께했다. 원래 외교관·교수를 지망했지만 어머니 암 투병비를 마련하려고 연기자로 돌아섰다고 한다. 58년 ‘그 밤이 다시 오면’으로 데뷔했고, 이듬해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으로 주목받았다.
  
60년 가까이 형님·아우 사이로 지내
 
‘빨간 마후라’(신상옥 감독·1964)에서 열연한 남궁원과 최은희.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빨간 마후라’(신상옥 감독·1964)에서 열연한 남궁원과 최은희.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남궁원은 60년대 초반 나와 함께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 전속 배우였다. 우리 모두 신 감독에게 빚진 바가 크다. 영화배우의 바탕을 만들어준 분이기 때문이다. 남궁원은 신 감독의 68년작 ‘내시’로 입지를 다졌다. 연극에서 기초를 닦은 나와 달리 그는 충무로 현장에서 연기 실력을 쌓아갔다. 노력파, 대기만성형 배우의 전형쯤 된다. 주변 사람들은 호쾌하고 선 굵은 이미지 때문에 나와 남궁원을 최대 라이벌로 꼽곤 하지만 사실 우리 사이에는 그런 경쟁의식은 거의 없었다.
 
남궁원은 사생활에서도 나와 비슷했다. 자존심이 셌고 자기관리와 가정생활에 충실했다. 사업 마인드도 있어 햄버거집·중식당 등을 운영했다. 자녀 교육에도 적극적이었다. 하버드대 출신으로 18대 의원을 지낸 홍정욱의 아버지로도 눈길을 끌었다. 그는 방송에서 “자녀들 유학비를 대려고 밤무대 행사부터 에로물 출연도 마다치 않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애하’(이형표·1967)에서 함께한 윤일봉과 고은아.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애하’(이형표·1967)에서 함께한 윤일봉과 고은아.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윤일봉은 한마디로 의리파다. 영화계 잡일이 있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나서는 편이다. 맺고 끊는 게 분명해 또 다른 후배 이순재(85)가 “윤일봉 선배는 꼿꼿한 분이다. 잘못된 부분을 못 참아 영화계에서 칼날로 불렸다”고 말할 정도다. 그런 성격을 잘 아는 나는 그를 98년 영화진흥공사 사장에 선뜻 추천했다.
 
윤일봉과 개인적 인연도 깊다. 70년대 중반 무렵이다. 40대 초반의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님, 제가 결혼을 하는데 주례 좀 서주세요.” 그와 나의 나는 고작 여섯 살 차이. 그런데 주례를 부탁하다니…. 그만큼 서로 믿고 의지하는 사이였다. 축하를 아끼지 않았다. “늦은 결혼이지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세요.” 이 일을 계기로 윤일봉의 처남인 탤런트 유동근(아내 전인화)의 결혼식 주례도 맡게 됐다. 윤일봉 일가는 소문난 연예인 집안이다. 사위가 탤런트 엄태웅으로, 5년 전 TV 예능프로 ‘해피선데이-슈퍼맨이 돌아왔다’에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윤일봉 결혼 때 주례 선생님도 맡아
 
윤일봉은 나보다 12년 앞선 1948년 데뷔했다. 중학생 때 철도 다큐영화에 캐스팅됐다. 첫 극영화는 정창화 감독의 ‘최후의 유혹’(1953)이고, 한국과 홍콩의 첫 합작영화 ‘이국정원’(1957)도 찍었다. 김기덕 감독의 ‘5인의 해병’(1961)에선 나와 함께했다. 우리 둘이 호흡을 맞춘 작품 중엔 이형표 감독의 ‘애하’(1967)가 독특했다. 한국영화로는 선구적으로 인공수정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다루며 호평을 받았다.
 
우리 셋이 함께한 영화는 많지 않다.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각기 바쁜 스케줄 때문일 것이다. 신성일의 세 번째 연출작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정도 생각난다. 그럼에도 배우라는 직업 앞에선 선·후배가 따로 없었다. 셋 모두 연기를 천직으로 알고 열심히 달려왔다.
 
2011년 ‘여인의 향기’로 데뷔 53년 만에 처음 TV 드라마를 찍은 남궁원은 “배우는 역시 카메라 앞에서 죽어야 한다.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윤일봉 또한 2012년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을 받으며 “영화는 영원한 꿈이다. 현장에서 들려오는 ‘레디 고’를 듣고 싶다”고 했다. 남궁원도 4년 전 같은 훈장을 받았다. 맥아더 장군의 명연설을 인용한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정리=박정호 논설위원,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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