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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무대서 먼 길 돌아와 흙을 만진다, 지금이 좋다”

중앙일보 2020.03.18 00:03 종합 20면 지면보기
‘원시정원’ 전시장의 배주현 작가. 원시적 질감의 도기들이 많은 이야기를 상상하게 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원시정원’ 전시장의 배주현 작가. 원시적 질감의 도기들이 많은 이야기를 상상하게 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서울 자하문로에 자리한 갤러리 우물(대표 이세은)이 도예가 배주현의 작품을 전시 중이다. 제목은 ‘원시 정원’. 성악가 출신인 작가가 놀랄 만큼 작은 ‘한 뼘’ 공간에 풀어 놓은 웅숭깊은 자연의 이야기가 인상 깊다.
 

갤러리우물, 배주현 작가 ‘원시정원’
도자와 흙·나무를 하나의 작품으로

작가가 빚은 토기들이 흙 바닥에 뒹구는 전시장은 마치 문화재 발굴 현장 같다. 작가는 “큰 산맥부터 작은 돌멩이까지 자연 풍경을 집 안으로 깊숙이 들여다 놓는다는 생각으로 작업해왔다”고 말했다.
 
엄밀히 말하면, 도자 전시가 아니라 ‘도자 설치’ 전이다. 도자뿐 아니라 작가가 전남 장성의 가마 근처 숲에서 주웠다는 편백 조각과 흙, 이끼가 어우러져 있다. 배 작가는 “도자 조각을 모아 하나의 이야기로 들려주고 싶었다”면서 “단순히 ‘보는’ 전시가 아니라 사람들이 토기 사이를 걷고 흙도 밟아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화려한 음악 무대에 섰던 그는 어떻게 흙을 만지는 일로 돌아서게 됐을까.
 
도자와 편백 나뭇조각이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됐다. [사진 배주현 작가]

도자와 편백 나뭇조각이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됐다. [사진 배주현 작가]

도자들을 땅에 풀어놓았는데.
“최대한 자연을 닮게 만들어보고 싶었다. (손에 잔 하나를 감싸 쥐며) 이게 누군가의 눈엔 투박한 잔이겠지만, 저는 눈 부신 햇살을 받아 따뜻해진 돌멩이의 감촉을 떠올리며 작업했다. 최대한 그런 느낌을 전하고 싶었다.”
 
깨진 것을 붙인 듯한 작품들도 많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자기만의 크랙(crack·갈라져 생긴 금)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부러 크랙을 만들어내며 작업한다. 망치로 깨기도 하고, 갈라진 곳은 옻칠해 붙이거나, 금이 간 데를 옻과 황토로 메꾸고 금을 씌우기도 한다. 그 흠을 메운 자국이 세상에 둘도 없이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그림이 될 수 있다.”
 
도자와 나무 조각이 하나가 된 작품이 특이하다.
“이번 전시 작업의 산실이 되어준 희뫼요 근처 편백 숲엔 비바람에 잘리고 꺾인 나뭇가지들이 널려 있다. 나무처럼 완벽한 조각품은 없는 것 같다.”
 
원래 노래를 불렀는데.
“음대 졸업 후 1995년부터 인천시립합창단 재창단 멤버로 활동했다. 미국 링컨센터, 카네기홀 등 안 서 본 무대가 없었다. 결혼해 합창 무대를 떠난 뒤엔 로마에서 음악 공부를 더 하고 한국에서 여러 오페라 무대에 섰다. 주목받는 삶이었지만 ‘내 것’을 찾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다.”
 
그래서 도자를 시작했나.
“30대는 제게 가장 화려하고, 가장 어려운 시간이었다. 결혼 뒤 사업과 오페라 무대를 병행하다가 30대 후반 시험관 시술로 아이를 갖게 되면서 음악과 사업 모두 내려놓고 그림과 도자를 만났다. 어릴 때부터 하고 싶었던 것을 시작하며 새 인생을 사는 듯한 기쁨을 느꼈다.”
 
당신에게 음악과 도자는 어떻게 다른가.
“음악은 즉각적이다. 무대에서 객석과 교감하며 느끼는 희열은 마약처럼 중독적이다. 하지만 혼자서 흙을 만지며 작업할 때 비로소 온전히 나 자신이 된 것 같은 충만함을 느낀다.”
 
그는 “반드시 값비싼 예술품이 우리를 위로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이 소박한 도자는 쓰는 사람의 뜻에 따라 꽃을 담을 수도, 국수를 담을 수도 있고, 또 그냥 두고 보는 오브제가 돼 기쁨을 줄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은 바로 이런 것”이라며 웃었다. 전시는 29일까지(오후 1~7시), 화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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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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