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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부인입니다, 좀 급합니다" 윤장현은 왜 이 문자를 믿었나

중앙일보 2020.03.17 06:00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윤장현 전 광주광역시장이 지난해 12월 광주 동구 광주고법에서 열린 항소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윤장현 전 광주광역시장이 지난해 12월 광주 동구 광주고법에서 열린 항소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드린 말씀이 또한 큰 짐이지요? 해내 주시리라 믿습니다. (중략) 여러 번의 세탁이 필요한 작업이지요. 안전이 우선입니다”

 
수차례 사기행각으로 실형도 살았던 김모(52)씨가 2017년 12월 윤장현(71) 당시 광주시장에게 보낸 문자메시지 내용이다. 두 사람 사이 문자와 통화가 오간 지 5일 만에 윤 전 시장은 김씨에게 2억원을 송금한다. 급하게 신용 대출을 받은 돈이었다. 윤 전 시장은 이렇게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부인 권양숙(73)씨를 사칭한 김씨에게 총 4억 5000만원을 보낸다.  
 

어떤 문자 오갔나

2017년 12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김씨의 사기 문자와 윤 전 시장의 답장은 수십차례 이어진다. “곧 경선이 다가오고 전쟁이 시작될 것입니다. 너무 큰 짐, 저도 곳간이 말라갑니다”란 문자에 윤 전 시장은 “주신 미션은 두드려보고 있습니다”라고 답한다. 이틀 뒤 윤 전 시장은 지인에게 1억원을 빌려 돈을 보낸다.

 
가짜 전 대통령 부인은 문재인 대통령과의 친분도 과시했다. 김씨는 “조만간 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 회동이 있고요. 우리 윤 시장님 말씀 잘 나눠보려고 합니다”라는 문자를 보낸다. 윤 전 시장은 은행에서 1억원을 대출받아 김씨가 알려준 계좌로 보냈다. 이후에도 김씨는 문 대통령, 추미애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언급한다. “공천에서 윤 시장의 상황을 숙지시킨다" “광주를 신경 쓰라고 했다” 등의 말도 함께 했다. 2018년 지방선거 더불어민주당 경선 날짜가 다가오고 당내 경쟁이 뜨거워지자 김씨는 “흔들리지 말아라” “대통령의 뜻”이라며 윤 전 시장을 안심시킨다. 하지만 그해 4월 윤 전 시장은 결국 불출마 선언을 하게 된다. 김씨는 끝까지 “제힘이 추미애에게 역부족이었나 봅니다, 문 대통령도 추에게 봉변을 당했나 봅니다”라며 거짓말을 한다.

 
윤장현 광주광역시장이 2018년 4월 4일 오전 시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마치고 나서 허리숙여 인사하고 있다. 윤 시장은 이날 6·13지방선거 불출마 뜻을 밝혔다. [연합뉴스]

윤장현 광주광역시장이 2018년 4월 4일 오전 시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마치고 나서 허리숙여 인사하고 있다. 윤 시장은 이날 6·13지방선거 불출마 뜻을 밝혔다. [연합뉴스]

재판에서 윤 전 시장은 김씨에게 돈을 보낸 것과 관련, "(김씨가) 권양숙씨인 줄 알았고, 전직 대통령과의 개인적 인연과 전 부인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빌려준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전 대통령 부인이 공천과 관련한 영향력을 행사해줄 것을 기대하고 보낸 돈이 아니니 공직선거법 위반이 아니라는 취지다.

 

法“전 대통령 부인 영향력 믿은 돈…빌려준 것 아냐”  

하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원은 “선거에서 정당의 공천을 받게 해줄 의사나 능력이 없음에도 이를 해줄 수 있는 것처럼 속여 공천과 관련한 금품을 받은 경우 공직선거법상 공천 관련 금품 수수죄와 사기죄가 모두 성립한다”는 대법원 판례를 들었다. 그러면서 “윤 전 시장은 김씨를 잔 대통령 부인으로 알고 영향력 행사를 기대하고 금품을 제공했고, 김씨도 외형적으로는 영향력 행사를 약속하고 금품을 받았다”며 “이 금품은 ‘후보자 추천’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고 판단했다.  
 
또 윤 전 시장이 4억 5000만원이라는 돈을 김씨에게 빌려준 것도 아니라고 판결했다. 윤 전 시장은 자신이 컷오프될 처지에 놓이자 김씨에게 다급히 문자를 보낸다. 법원은 이를 “어렵게 빚을 내 돈을 보냈는데 약속과 달리 광주시장 선거 경선 본선에도 못 가는 상황을 김씨에게 알리려 했다”며 “광주시장 후보자 추천에 영향력을 기대하며 보낸 돈”이라고 판단했다.  
 

‘대통령 부인’사칭, 왜 믿었을까

윤 전 시장은 전직 대통령과의 인연을 주장했지만 실제 윤 전 시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정치활동을 하거나 공직 생활을 한 적이 없었다. 권양숙씨의 실제 육성이나 휴대전화 번호도 몰랐다. 법원은 “전 대통령 부인의 품격에 맞지 않게 노골적으로 거액의 자금을 요구하는데도 다른 경로를 통한 확인 조치를 하지 못했다”며 윤 전 시장이 전 대통령 부인과 친분이 있다고 볼만한 사정이 없다고 판단했다. 실제 김씨는 윤 전 시장 외에도 4명의 지역 정치인에게 전 대통령 부인이라며 접근했지만 이들이 믿지 않아 범행에는 실패했다.

 
김씨는 윤 전 시장에게 일인다역을 하기도 했다. 권씨의 딸 정연씨를 사칭해 문자를 보낸 뒤 다시 "정연이가 연락드렸는데, 너무 급작스러워 준비가 어려우신지요? 조직 관리가 이렇듯 힘들지요”라며 문자를 보낸다. 김씨는 노 전 대통령의 혼외자가 있었다며 그의 취업도 윤 시장에게 부탁한다. 문자를 보낸 다음 날에는 혼외자의 엄마를 사칭하며 광주시청에서 윤 전 시장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하급심은 윤 전 시장과 김씨의 공직선거법 유죄 및 김씨의 사기죄를 인정했다. 윤 전 시장은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김씨는 항소심에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대법원도 이를 옳다고 보고 상고를 기각했다고 17일 밝혔다.

 
이수정 기자 lee.suej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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