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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 코로나 아이러니…정부가 못한 고용·노동 혁신 해냈다

중앙일보 2020.03.17 00:02 경제 1면 지면보기
출퇴근 시각, 승객들로 붐비던 서울 지하철 1호선이 예전보다 한산해졌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외출을 자제하고, 재택근무를 시행하는 기업이 늘어난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연합뉴스]

출퇴근 시각, 승객들로 붐비던 서울 지하철 1호선이 예전보다 한산해졌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외출을 자제하고, 재택근무를 시행하는 기업이 늘어난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연합뉴스]

신한은행이 16일부터 콜센터 재택근무에 들어갔다. 금융권에서 처음이다. 콜센터는 고객과 얼굴을 직접 대면하지 않을 뿐 사실상 준(準)대면 업종으로 여겨져 재택근무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더욱이 직원이 집에서 고객정보를 다루다 자칫 유출되면 금융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민감 업종이다. 신한은행이 거액을 들여 개인정보 보호 솔루션을 개발했지만 금융감독원이 그간 난색을 표한 이유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이를 풀었다. 이유철 홍보팀장은 “(재택근무가) 안 될 줄 알았다”며 “최근 금감원과 고객정보 보호 등과 관련한 협의가 잘 진행돼 재택근무에 돌입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유연근무제 ‘노동개혁급’ 확산
‘재택근무 불가 성역’ 콜센터까지
노동계 반대하던 제도 빗장 풀려
‘9 to 6’ 대신 업종별 맞춤근무 도입
호봉·역할급 임금제 변화도 촉진

박영만 고용노동부 산재예방보상정책국장은 “불합리하거나 후진적 근무체계, 저소득층의 생계 위협, 미흡한 안전대책 같은 산재한 노동문제를 역설적이게도 코로나19가 낱낱이 밝혀내 바로잡고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사태가 산업현장의 고용·노동 문화를 바꾸고 있다. 정부도 고용정책 개편작업에 시동을 걸었다. 겉으로는 코로나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정책은 한 번 시행되면 바꾸기 힘들다. 정부도 이런 점을 고려해 이번 기회에 지속가능한 정책으로 정착시키려 한다. 노동개혁에 버금가는 코로나 ‘나비효과’가 부는 셈이다.
 
유연근무제가 대표적이다. 재택근무, 시차출근, 선택근로, 탄력근로와 같은 유연한 근무체계는 그동안 노동계와 일부 정치권의 반대에 부딪혀 확산하지 못했다. 지난해 말 취업포털 사람인이 454개 기업을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 70%가 유연근무제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하지만 시행하는 곳은 10곳 중 두 곳(19%)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9시에 출근해 6시에 퇴근하는 이른바 ‘9 to 6’ 근무체계였다.
 
코로나 사태가 생긴 뒤 달라졌다. 이동통신 3사 콜센터가 일제히 재택근무에 들어가는 등 상당수 기업이 유연근무를 속속 도입하고 있다. 정부도 팔을 걷어붙였다. 재택근무를 도입하는 중소·중견기업에 최대 2000만원의 인프라 구축비용을 지원하기로 했다. 1인당 연 최대 520만원에 달하는 간접노무비도 준다. 까다롭던 절차를 단순화해 사실상 신청만 하면 지원할 방침이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 교수는 “기업이 대거 유연근무제를 경험하면서 회사 사정에 맞는 근무체계를 선별할 수 있게 됐다”며 “획일적 유연근무 확산이 아니라 업종별로 적합한 근무체계를 선택하게 되고, 이는 다양한 근무체계 도입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유연근무 확산으로 임금체계의 변화도 촉진할 전망이다. 예컨대 재택근무는 근무시간을 기준으로 보상하는 체계가 아니다. 성과나 직무, 역할을 어떻게 수행하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임금체계도 그에 맞춰 변해야 한다. 해가 바뀌면 임금이 자동으로 오르는 호봉제 대신 직무급이나 역할급으로 변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는 의미다. 정부는 올해 초 경제정책방향을 발표하면서 임금체계 개편을 천명했다.
 
한국형 실업부조제(국민취업지원제도)도 사실상 첫발을 뗐다. 이재갑 고용부 장관은 16일 “모든 구직자에게 취업성공패키지 참여 문호를 개방한다”고 발표했다. 취업성공패키지는 정부가 매달 일정액을 주고 취업 때까지 컨설팅하는 제도로 지금까지는 중위소득 이하에게만 적용했다. 이 장관은 “국민내일배움카드의 훈련비 상한액도 5년간 300만원에서 500만원으로 상향 조정한다”고 덧붙였다.
 
“모든 구직자에 훈련비 지원” 한국형 실업부조도 사실상 첫발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 교수는 “정부의 이런 조치는 저소득 취약계층에 매달 50만원씩 6개월간 훈련비와 생활비 등을 지원하는 한국형 실업부조제와 궤를 같이한다”고 분석했다. 한국형 실업부조제는 예산(2771억원)을 확보했지만 국회 입법이 안 돼 시행이 늦춰졌다. 노사정은 지난해 3월 한국형 실업부조 도입에 합의했다. 임서정 고용부 차관은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취업이 어려운 계층에 대한 정부의 구직 지원제도를 촘촘하게 재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외에 경영상 어려움을 겪는 기업에 지원하는 휴업수당도 근로자 1인당 하루 6만6000원에서 7만원으로 상향 조정했다. 유명무실하던 가족돌봄휴가도 활성화해 일·가정 양립 문화에 한 발 더 다가섰다.
 
특히 직업적 트라우마에 대한 심리상담이 강화된다. 선진국에는 보편화한 정책이다. 한국에선 2009년 77일간 공장 문을 걸어 닫고 벌인 ‘옥쇄파업’을 야기했던 쌍용자동차 구조조정 당시 해고자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등 사건이 벌어질 때만 잠깐 시행했다.  
 
그동안 정부는 심리상담의 제도화를 꾀했으나 소요예산이나 필요성에 대한 정치권과 경영계의 이의제기 때문에 좌초했다. 고용부는 16일부터 전국에 전문상담센터 8곳을 설치해 운영에 들어갔다. 심리검사, 심리상담, 심리교육, 사후관리와 같은 전문상담 프로그램이 제공된다. 유경준 한국기술교육대 교수는 “취업 상담 과정에서 심리적 안정을 찾아주는 일은 가장 기본적인 지원책”이라며 “늦게나마 핵심 취업지원제도가 도입된 것은 큰 변화”라고 말했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wol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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