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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여자한복 입고 낄낄대던 남학생들, 그 일상이 그립다

중앙일보 2020.03.15 11:00

[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66)

 
요즘 집안일을 열심히 한다. 일 년 전에 단독주택으로 이사 올 때만 해도 내가 과연 이 집을 손보고 고쳐가며 살 수 있겠나 싶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기술과 재주가 조금씩 늘어 이제 전등과 전선, 도배, 가지치기 같은 자잘한 일에는 주저함이 없다. 사다리, 톱 같은 공구도 점점 늘고 적극성도 생기니, 움직이고 신경 쓰는 만큼 집안 꼴이 달라진다. 일에 재미를 붙였냐고? 아니다. 따로 할 일이 없어서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모든 일상이 정지되었다. 당장 생활의 일부인 도서관, 수영장, 성당 그 어느 곳에도 갈 수 없고, 참석하려던 행사와 강연이 연기된 데 이어, 친구들과의 약속도 다 취소되었다. 할 수 있는 일은 집안 곳곳을 치우거나 보수하고 강아지와 산책하고 가끔 동네 식당에서 밥 먹는 것뿐이다.
 
인적 끊긴 전주 한옥마을은 참 낯설다. 이제 곧 코로나19가 물러나고 사람들로 다시 활력을 찾으리라 기대해본다. [사진 박헌정]

인적 끊긴 전주 한옥마을은 참 낯설다. 이제 곧 코로나19가 물러나고 사람들로 다시 활력을 찾으리라 기대해본다. [사진 박헌정]

 
이럴 때는 글도 잘 안 써진다. 바깥에서 보고 겪은 일을 머릿속 대장간의 화로에 녹여 모루에 놓고 내리쳐야 모양이 잡히는데 재료공급이 원활치 않다. 아내 말고는 이야기 나눌 사람조차 없다. 세상이 어수선하니 책도 눈에 안 들어온다. 할 일 없으면 TV로 스포츠 중계나 보면 될 것 같았는데 스포츠도 전부 중단되었다.
 
이런, 지금 자질구레한 하소연 할 때가 아니다. 이미 큰일은 났지만 정말 큰일이다. 나라가, 세계가 다 아프니 내가 사는 전주도, 우리 동네도 아프다. 한옥마을에는 관광객의 발길이 뚝 끊겼다. 외국인만 좀 다닐 뿐, 기온 내려가는 오후부터는 사람이 전혀 없어 입장시간 지난 드라마 세트장 같다.
 
여자 한복을 입고 킬킬대던 남학생들 모습이라도 좀 보고 싶다. 며칠 전 들른 단골 식당에서는 도가니 수육이 너무 익어 무르게 씹혔다. 손님이 적어 솥에 오래 있었나 보다.
 
예전에 TV에서 파산한 일본 도시를 보았다. 텅 빈 거리와 문 닫은 상점, 폐교 직전인 대학교 학생들의 걱정, 변화와 자극 없이 살아가는 노인들의 우울함…. 남의 일로만 생각했는데 일상에서 싱싱하게 살아 움직이는 기운이 없는 게 얼마나 큰 공포이고 아픔인지 이제는 알 것 같다.
 
사람이 돌아다니고, 부지런히 일하고, 아이가 떼쓰고, 연인들이 꼭 붙어있는 보통 세상…. 그게 참 아름다운 것이었다. 한번 아파 보면 건강의 소중함을 안다더니, 빈 거리를 보자니 번잡하고 왁자하던 때가 새삼 그립다.
 
우리 마을만 아픈 게 아니다. 직장인들도 출근은 하지만 심란해서 손에 일이 안 잡히고 할 일도 많이 줄었단다. 내 경험상 이런 때는 ‘해야 돼, 말아야 돼?’ 따지다 시간 되면 퇴근했던 것 같다. 재택근무하는 곳도 많다.
 
한 가게에 임대인에 대한 감사 인사가 적혀있었다. 이번 일은 서로 챙겨주는 마음으로 다 함께 이겨내야 할 일이다.

한 가게에 임대인에 대한 감사 인사가 적혀있었다. 이번 일은 서로 챙겨주는 마음으로 다 함께 이겨내야 할 일이다.

 
손님 끊어진 자영업자, 개학이 연기된 학생과 함께 발목 잡힌 부모, 강연과 행사가 취소되어 일이 없어진 프리랜서…. 전부 힘들다. 원치 않던 휴지(休止)로 생계와 생활이 곤경에 처했다. 누군 이럴 때 충분히 재충전하고 가족과 시간도 가지라며 위로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미증유의 단체휴식은 ‘원초적으로 잘 놀기’를 고민하는 나로서도 다루기 힘든 크기다. 휴식은 고된 노동 틈틈이 잘게 끊을수록 맛있고 달콤하지 않은가.
 
아직 사람들의 절망, 슬픔 같은 감정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너무 큰 충격은 마비를 불러오기에 현실감을 느끼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 충격과 아픔은 천천히 그러나 집요하게 다가올 것이다. 우리의 앞날을 표현할 말을 고르라면 ‘고생’이 적절하겠다. 우리 모두는 고생할 예정이다.
 
집 근처 산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꼼짝 말고 집에만 있으라던 초기와 달리 전문가들은 사람 없는 근교나 산을 찾는 게 몸과 마음 건강에 유익하다며 권한다. 장기전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집 근처 산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꼼짝 말고 집에만 있으라던 초기와 달리 전문가들은 사람 없는 근교나 산을 찾는 게 몸과 마음 건강에 유익하다며 권한다. 장기전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전쟁이 비참한 건 다 아는 일이다. 나는 처음에 전쟁에 비해 전염병은 훨씬 쉽다고 생각했다. 전쟁은 사람들의 생각과 욕망이 달라 서로 싸우고 결국 죽음으로 결판내지만, 적어도 전염병은 인간이 힘을 합쳐 보이지 않는 병균에 대적하는 것이니까.
 
그런데 요즘은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어떤 위협에 맞서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음을 느낀다. 많은 사람이 잠도 못 자며 사투를 벌이는데 한쪽에서는 마스크 빼돌리고, 정치적 도구나 쟁점으로 삼고, 다른 나라를 극단적으로 비난하고, 가짜 뉴스, 혐오와 낙인, 책임자의 말실수…. 처음에는 코로나와 싸움을 시작했는데 전선이 자꾸 엉뚱하게 확장된다. 그러면서 바이러스의 의학적 위협과는 별개로 불안과 공포감은 저 스스로 커졌다. 바이러스를 인간, 국가, 종교와 떼어놓고 바이러스로만 생각할 수는 없는 걸까?
 
이런 때에는 누구나 불만도 많고 하고 싶은 말도 많다. ‘이 시국에 한가한 소리’라며 면박도 준다. 그러나 전쟁 중에도 군인은 싸우고 농부는 농사짓고 문인은 글 쓰고 공장은 공장대로 돌아가야 한다. 서로 보듬으며 일상을 지켜야 바이러스가 물러난 후에도 우리 삶을 이어갈 체력이 남아있지 않을까.
 
주일에 미사 없는 성당 대신 나들이 갔다. 많은 사람이 마스크 쓰고 나와 봄 햇살을 즐겼다. 벌써 나무에 물이 오르고, 꽃망울도 머금었다. 땅이 녹아 개울물 소리는 풍성해졌다.
 

김제 금산사 뒤뜰의 매화는 찾아주는 사람 없어도 봄이 되니 알아서 꽃망울을 터뜨렸다. 소리 없이 찾아온 봄처럼 우리 일상도 언젠가 정상으로 돌아와 있으면 좋겠다.

 
문득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하는 시가 떠올랐다. 물론 그 봄은 이 봄과 다르지만 바이러스에 공격당한 이 세상에도 봄은 오고 있다. 서로 눈치 보며 멀찌감치 떨어져 걷는 사람들 마음속에 봄은 언제 올까. 봄이 오면 우리는 다시 충분히 강해지겠지? 아무도 찾지 않는 금산사 뒤뜰의 매화나무, 세상은 어수선해도 정성껏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우리도 새 삶을 피워내야 한다.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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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정 박헌정 수필가 필진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 25년간의 회사생활을 정리하고 50세에 명퇴금 챙겨 조기 은퇴해서 책 읽고, 글 쓰고, 여행하는 건달이자 선비의 삶을 현실화했다. 은퇴 후 도시에 뿌리 박혀버린 중년의 반복적이고 무기력한 삶에 저항하기로 했다. 20대는 돈이 없어 못하고, 30-40대는 시간이 없어 못하고, 60대는 힘과 정보가 없어 못하던 일들, 꿈만 같지만 결코 꿈이 아닌 현실이 되어야 할 일들, 50대의 전성기인 그가 그 실험에 도전하고 그 과정과 결과를 인생 환승을 앞둔 선후배들과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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