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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자툰 “선쥔산이 홍콩 오면 바둑 두게 자리 만들어라”

중앙선데이 2020.03.14 00:20 677호 29면 지면보기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17〉

진융(뒷줄 왼쪽 둘째)은 신문기자로 사회에 첫발을 디뎠다. 밍바오(明報)를 창간하며 경영을 위해 무협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다궁바오(大公報) 기자시절의 모습. [사진 김명호]

진융(뒷줄 왼쪽 둘째)은 신문기자로 사회에 첫발을 디뎠다. 밍바오(明報)를 창간하며 경영을 위해 무협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다궁바오(大公報) 기자시절의 모습. [사진 김명호]

흔히들 선쥔산(沈君山·심군산)과 롄잔(連戰·연전), 천리안(陳履安·진리안), 첸푸(錢復·전복)를 “대만 4공자(四公子)”라 불렀다. 대만은 물론이고 대륙에서도 그랬다. 4공자는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1930년대에 태어났다. 공자 소리 들으려면 가계가 중요하다. 전 국민당 주석 롄잔의 조부는 모두가 인정하는 대만의 애국시인이었다. 일본 식민지 시절 일제의 황민화 정책이 전염병처럼 창궐하자 대만통사(臺灣通史)를 저술한 문단과 학계, 언론계의 대부였다. 정치가였던 부친도 재직 중 칭송을 받았다. 총통부 건너편 2·28 기념공원(원래는 청년공원)에 흉상을 세울 정도로 청년들의 우상이었다.
 

대만 4공자의 1인 물리학자 선쥔산
학생 때부터 수학·바둑 분야서 두각
NASA 연구원, 미국 체스대회 우승

일국양치 주장하며 양안관계 공헌
일국양제 옹호자 진융과 즐겨 대국

천리안은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직계 천청(陳誠·진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50년대 대만은 출국이 하늘의 별 따기였다. 공무 출장 아니면 엄두도 못 냈다. 유학도 예외가 없었다. 천리안이 대학 1학년 때 MIT에서 전액 장학금 증서를 받는 바람에 규정이 바뀌었다. 화교 사회에서는 일찌감치 미래의 총통감 소리가 나돌았다.
 
선쥔산(왼쪽 둘째)은 기성(棋聖) 우칭위엔(吳淸源 왼쪽 셋째), 명인 린하이펑(林海峰 오른쪽 첫째)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사진 김명호]

선쥔산(왼쪽 둘째)은 기성(棋聖) 우칭위엔(吳淸源 왼쪽 셋째), 명인 린하이펑(林海峰 오른쪽 첫째)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사진 김명호]

1980년대 초, 홍콩의 유명 잡지에서 본 내용이 새롭다. 기억을 더듬어 소개한다. “마오쩌둥과 장제스 모두 세상을 떠났다. 대만 총통 장징궈(蔣經國·장경국)는 앞으로 장씨가 통치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장징궈는 건강에 문제가 많다. 덩샤오핑과 장징궈 이후 양안의 집권자를 현재는 예측하기 힘들다. 중국공산당과 중국국민당은 혁명정당이다. 혈통이 중요하다. 중공은 현 부총리 리펑(李鵬·이붕)이 가장 유력하다. 리펑은 1세대 혁명가 리스쉰(李碩勛·이석훈)과 자오쥔타오(趙君陶·조군도)의 외아들이다. 국민당은 세 살배기 리펑이 보는 앞에서 리스쉰을 참수했다.  
 
외삼촌 자오스옌(趙世炎·조세염)도 국민당에 참살당했다.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은 프랑스 유학 시절부터 리스쉰과 자오스옌의 절친한 동료였다. 파리에서 소년공산당도 함께 결성했다. 리펑은 중공의 적자(嫡子)로 손색이 없다. 대만은 4공자 중 한 명인 천리안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중공 차세대 리더로 리펑 주목받아
 
1999년 선쥔산은 중풍으로 쓰러졌다. 베이징의 301병원에서 극진한 치료를 받았다. 병실을 찾은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량전닝(왼쪽). [사진 김명호]

1999년 선쥔산은 중풍으로 쓰러졌다. 베이징의 301병원에서 극진한 치료를 받았다. 병실을 찾은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량전닝(왼쪽). [사진 김명호]

리펑은 대륙에서 총리와 전인대 상무위원장을 역임했다. 천리안은 대만 정계의 모범생이었다. 1980년대 말 재정부장과 국방부장, 감찰원장을 거친 후 총통 직에 도전했다. 선거판에서 청렴과 성실은 통하지 않았다. 후보 네 명 중 꼴등을 하자 공자의 진면목을 드러냈다. 세상과 담을 쌓고 불교에 심취했다.
 
주미대사와 외교부장을 역임한 첸푸의 할아버지는 상하이 검찰국 검사였다. 좀도둑에겐 인정을 베풀고, 큰 도둑에겐 국물도 없었다. 사소한 일로 고소, 고발을 일삼는 사람을 인간 취급하지 않았다. 제일 천하고 더러운 직업이 검사와 판사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업자에게 돈 받아먹은 선배 검사 면상에 “없는 범인도 만들어 내는 놈”이라며 주먹 날린 적도 있었다. 중일전쟁 초기, 일본이 세운 괴뢰정부의 협조 요청을 거부하다 암살당했다. 부친 첸스량(錢思亮·전사량)은 대만대학 총장과 중앙연구원 원장을 지낸 과학자였다. 형들도 재정과 의학계에서 명성을 날렸다. 첸푸는 후배들을 엄격히 교육했다. 전 대만 총통 마잉지우(馬英九·마영구)도 첸푸를 스승으로 모셨다.
 
물리학자 선쥔산은 양친이 미국 유학을 마친 농업 전문가였다. 학생 시절부터 수학과 바둑에 두각을 나타냈다. 축구부와 농구부 주장도 겸했다. 수학과 바둑에 관한 글이 교사들의 주목을 받았다. “바둑과 수학은 머리를 단련시키는 훈련의 일종이다. 바둑은 수학에 없는 우수한 점이 있다. 청소년들이 진검승부의 장인 사회에 진입하기 전, 시험 삼아 싸워볼 수 있는 곳이 바둑판이다. 패해도 상처를 입지 않는, 좋은 체험을 할 수 있다. 바둑은 한번 배우면 평생 잊어먹지 않는다. 실력이 퇴보하는 법도 없다.”
 
고등학생 시절의 천리안. 왼쪽은 부친 천청. 국민당 부주석과 부총통을 겸했다. [사진 김명호]

고등학생 시절의 천리안. 왼쪽은 부친 천청. 국민당 부주석과 부총통을 겸했다. [사진 김명호]

무협소설의 대가 진융(金鏞·김용)과의 인연도 시작은 소설이었지만, 결국은 바둑이었다. 선쥔산은 미국유학 시절 진융의 애독자였다. “1960년대 초 진융은 자신이 발행하던 명보월간(明報月刊)에 무협소설을 연재했다. 연재를 마치기가 무섭게 유학생 사회에 해적판이 나돌았다. 프린스턴대학에 재학 중이던 나는 주말마다 뉴욕에 갔다. 데이트하고 중국 음식 먹은 후에 진융 소설을 사러 책방으로 달려가곤 했다. 소설을 보면서 작가가 바둑에 심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회가 되면 만나고 싶었다.” 선쥔산은 바둑만이 아니었다. 체스 실력도 발군이었다. 졸업 후 전 미국 체스대회에 출전, 우승했다.
 
1964년 봄, 선쥔산은 귀국길에 올랐다. 진융을 만나기 위해 홍콩을 경유했다. 밍바오(明報)에 전화를 걸었다. 진융이 나사(NASA) 연구원과 퍼듀대학의 강단에 섰던, 미국 체스대회 석권자의 이름을 모를 리 없었다. 명보월간 동인들과 함께 31세의 대만 귀공자에게 풍성한 만찬을 베풀었다. 그날 밤 선쥔산은 호텔로 돌아가지 않았다. 산 중턱에 있는 진융의 저택에서 단잠을 잤다. 이날 이후, 선쥔산은 홍콩에 갈 때마다 진융을 찾았다. 진융도 선쥔산이 오면 모든 약속을 취소했다. 두 사람은 취향이 비슷했다. 수십 년이 지나도 한결같았다.
  
진융·선쥔산 이념 초월한 우정 나눠
 
청년외교관 시절 첸푸(왼쪽 첫째)

청년외교관 시절 첸푸(왼쪽 첫째)

대만에 돌아온 선쥔산은 칭화대학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행정원 정무위원으로 입각한 것 외에는 대학을 떠나지 않았다. 국사(國事)에도 관심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민주화와 양안 관계에 독특한 공헌을 했다. 1980년대, 대만은 계엄상태였다. 정부와 재야의 소통에 발 벗고 나섰다. 민주화 운동으로 투옥된 인사들의 보석을 끈질기게 청원했다. “국민당은 혁명정당이다. 지금은 민주인사들을 석방하고 다당제를 수용하는 것이 혁명이다.” 총통 장징궈는 한 술 더 떴다. 결자해지, 민주인사들을 풀어주고 야당 창당도 하건 말건 내버려 뒀다. 38년간 지속된 계엄령도 해제했다. 덩샤오핑이 일국양제를 제창하고 손을 내밀어도 모른 체했다.
 
선쥔산은 일국양제를 비판했다. 실현 불가능한 정책이라며 일국양치(一國兩治)를 주장했다. 중공은 선쥔산에게 눈독을 들였다. 신화통신 홍콩분사 사장 쉬자툰(許家屯)이 진융에게 부탁했다. “선쥔산이 홍콩에 오면 자리를 만들어라.” 이유도 댔다. “고수와 바둑을 한판 겨루고 싶다.” 진융은 일국양제의 옹호자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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