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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모임도 일도 두렵다…자가격리에 빠진 사회

중앙일보 2020.03.12 13:00

[더,오래] 윤경재의 나도 시인(56)

 
乙0乙0 0乙乙0
 
2020, 0220
목요일의 스마트한 창
미세먼지 보통
초미세먼지 나쁨
스며든 코로나19
‘시 창작 교실 당분간 휴강’
 
겨우 서넛이 모이는데
시도 스스로 격리된다
 
슬며시 사라진 1들 사이로
헛헛한 구멍에 둘러싸인 2들
머리 숙여 기도하는 모습
김 서린 유리창에 쓴 입겻은
하릴없는 새벽의 구두점이 된다
 
왕관을 탐하는 자들
은밀을 섬기는 자들
 
이리 끊어도 저리 붙여 읽어보아도
만약에, 만약에 밖에 가지지 못한
乙에겐 해석이 안 되는 세월이다
 
해설
2020년 새해가 밝았을 땐 누구나 희망에 찬 인사말을 나누고 악수하며 서로 껴안았다. 그러나 미처 두 달도 지나지 않아 사회는 자가격리 속에 빠지고 말았다. 혹시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내 동선이 까발려지고 애먼 사람과 영업을 하는 이웃에게 폐를 끼칠까 두렵기만 하다. 또 가족은 어찌될 것인가.
 
확진자가 거쳐 간 장소는 자발적으로 폐쇄되었다. 성당의 미사는 사순절이 다가왔어도 236년 만에 처음으로 모두 중단되었다. 친구들의 소규모 친목모임과 등산 등 운동모임도 중단되었다. 초기에 감염 장소라고 알려진 결혼식과 장례식 관련 뉴스 탓에 가까운 친지의 혼사와 애사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음식을 먹을 때 앞사람과 침이 튈 수 있기에 손님이 줄어든 식당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거리에 사람들이 다니지 못하니 자영업을 하는 곳은 업종을 가리지 않고 손님이 거의 끊겼다. 친구들 병의원도 마찬가지란다. 아픈 사람마저 줄어들었나보다.
 
내가 참여하는 각종 스터디 모임이 취소되었다. 심지어 시 모임도 중단되었다. 스마트폰 알림으로 띵동 하고 날아온 ‘시 창작 교실 당분간 휴강’이란 문자. 겨우 세 명이 모이는 곳인데, 안타깝다. 강의실 전체가 닫혔으니 어쩌겠는가.
 
친구들의 소규모 친목모임과 등산 등 운동모임도 중단되었다. 초기에 감염 장소라고 알려진 결혼식과 장례식 관련 뉴스 탓에 가까운 친지의 혼사와 애사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사진 Flickr]

친구들의 소규모 친목모임과 등산 등 운동모임도 중단되었다. 초기에 감염 장소라고 알려진 결혼식과 장례식 관련 뉴스 탓에 가까운 친지의 혼사와 애사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사진 Flickr]

 
불면의 밤, 이른 새벽에 일어나 오늘 날짜를 유리창에 입김을 불고 적어본다. 2020년 2월 20일. 숫자 2와 0들의 조합. 상념에 빠진다. 2는 한자 乙처럼 보인다. 사회가 어려울 때는 그 피해를 고스란히 힘없는 乙들이 겪는다.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다. 모두가 힘들겠지만 가진 것 없고 비빌 언덕이 없는 약자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지뢰밭이다. 말만 번지르르 하게 내세우는 1들, 자신의 실책을 감추기에만 급급하다. 숫자 2는 마치 사람이 무릎 꿇고 머리를 숙이며 기도하는 모습을 닮았다.
 
乙자를 창에 적어보니 옛날 한문 공부할 때 구두점이 떠오른다. 중국에서 들어온 한문은 우리말과 어순이 달라서 해석하려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래서 선조들은 어려운 한문에다 이두처럼 생긴 기호를 써서 문장을 끊어가며 읽고, 공부하여 후배들을 가르쳤다. 한문에 없는 우리말 주격조사나 목적격조사, 접속조사를 덧붙여 읽은 것이다. 그런 걸 구결 또는 입겻이라 부른다. 대표적인 게 ‘~은, ~이, ~을, ~하니, ~하고, ~이라’ 등이며 각각 부호를 만들어 썼다. 여기서 입겻 乙은 ‘~을’이란 목적어미를 뜻한다. 입겻 ‘口’는 ~고, ‘阝’는 ~은, ‘亻’는 ~이, ‘厂’는 ~에, ‘匕’는 ~니 등을 나타낸다.
 
당시 선진문물이었던 한문을 쉽게 받아들이기 위해서 선조들은 우리말 어순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부호를 붙여 사용한 것이다. 문리가 틔기 전에 공부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해석이 잘못되는 걸 미리 차단한 셈이다. 우리 상황에 알맞게 변형시켜 받아들이는 것 이런 게 삶의 지혜이다.
 
바이러스와 같은 전염병에 대처하는 방법은 가능한 전파시간을 늦추어 백신이나 치료약이 개발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2009년 멕시코에서 돼지를 매개체로 발생한 신종플루 때는 다행이 치료약이 빨리 개발되었다. 몇 개월 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당시 우리나라는 76만여 명의 환자와 263명의 사망자를 내었다. 역시 초기 대응이 늦어서 확진자가 많이 발생했었다. 이번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각자 가진 능력의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하며 이웃에게 위로와 마음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게 지나간 뒤 돌이켜 보며 다시 실수하지 않을 대책을 세워야 한다. [사진 Pixabay]

각자 가진 능력의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하며 이웃에게 위로와 마음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게 지나간 뒤 돌이켜 보며 다시 실수하지 않을 대책을 세워야 한다. [사진 Pixabay]

 
코로나19 발생 초기에 대만은 우리나라보다 확진자 수가 많았다. 그러나 한 달 뒤 3월9일자 환자수는 아예 비교가 안 된다. 45명대 7382명이다. 굳이 세세한 과학적인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누구라도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백신과 치료약이 얼른 개발되기만을 기다려본다.
 
힘없고 가진 게 없는 乙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만약에 ~했으면 어땠을까하고 가정해 보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乙끼리라도 협조하고 공동체 의식을 나누는 길만이 그나마 이 사태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각자 가진 능력의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하며 이웃에게 위로와 마음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게 지나간 뒤 돌이켜 보며 다시 실수하지 않을 대책을 세워야 한다.
 
비록 보잘것없지만 졸시를 읽고 잠시 가벼운 미소나 지으셨으면 하고 바란다. 지금 이 시간 대구 등 일선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의사와 간호사들, 전국 보건 공무원들에게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한의원 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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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재 윤경재 윤경재 한의원 원장 필진

[윤경재의 나도 시인] 시를 시인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시쓰기를 어려워들 합니다. 그러나 시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작품이든 아니든 시를 쓰면 모두 시인입니다. 누구나 그저 그런 일상을 살다가 문득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오래 기억에 남는 특별한 체험이라면 감정을 입혀 쓰는 것이 바로 시입니다. 시인으로 등단한 한의사가 연재하는 시를 보며 시인이 되는 길을 가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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