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예영준의 시선] 코로나 바이러스가 알려 준 진실

중앙일보 2020.03.12 00:29 종합 28면 지면보기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백해무익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딱 한 가지 역할을 한 게 있다면, 그동안 잘 몰랐거나 막연하게만 알았던 중국 체제의 실상과 문제점을 명확하게 드러내 줬다는 점이다. 3주 전 칼럼에서 썼던 문장인데 이를 수정해야 할 것 같다. 그 사이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알려 준 게 훨씬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백일하에 드러난 정부의 실력
‘외교·방역 별개’ 원칙 못 지키고
외교장관은 중국에 훈계 들어

이제 모든 국민이 다 알게 된 비밀 아닌 비밀은 정부의 무능이다. 첫 확진자가 나온 지 50일이 지나도록 마스크 대란 하나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 딱 그것이 정부의 실력이자 능력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하지 않았던가.
 
국민을 더 좌절시키고 분노지수를 올라가게 만든 원인은 실력 자체에만 있는 게 아니다. 바닥을 드러낸 실력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과 알량한 자부심을 더 큰 문제로 보는 사람이 많다. 세계 100여 국가가 한국인 입국을 금지 또는 제한하고 있는데 한국의 방역이 세계의 모범이고 표준이 될 것이라고 한다. 세계의 민폐국이 되고 있는 판에 낯뜨거운 자화자찬을 늘어놓는 위정자들의 마인드로는 어디서부터 무엇이 어떻게 잘못됐는지 성찰이 일어날 여지가 없다. 타고난 나르시시즘의 소산이거나 집단적 ‘정신승리’에 빠진 결과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자화자찬의 반복은 후천적으로 학습한 전략일 수도 있다. 중국에서 코로나19의 기세가 한풀 꺾이자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발원지 우한(武漢)을 방문했다. ‘전염병과의 인민전쟁’을 진두지휘해 승리했음을 선포하는 행보였다. 원래 인민전쟁이란 개념 자체가 공산혁명을 이끈 마오쩌둥(毛澤東)이 만든 것이다.
 
시 주석이 마오와 같은 전쟁 영웅의 반열에 오르는 순간, 우한의 실상을 알린 의사의 진언을 묵살하고 초기 대응에 실패한 과오, 사람 간 감염이 된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파악하고서도 상당 기간 정보를 공개하지 않아 전 세계에 코로나19가 퍼지도록 한 중국의 책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책임자가 영웅으로 둔갑하게 되는 것이다.
 
흑을 백으로, 백을 흑으로 만들고 난 뒤 그렇게 선전하면 백성들은 묵묵히 믿고 따르게 하는 게 중국 공산당의 발상법이다. 방역 실패의 책임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이 ‘세계의 표준’ 운운할 수 있는 사고구조도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국경을 넘어온 바이러스에 걸리듯, 부지불식간에 ‘운명공동체’라 규정한 중국식 통치술에 감염된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런데 정작 중국이 고수하는 원칙을 우리는 지키지 못한 게 하나 있다. 환구시보가 사설에 쓴 것처럼 ‘외교와 방역은 별개’란 원칙이다. 중국 각 지역에서 한국인 입국자들을 격리시키는 사례가 잇따르자 강경화 장관이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에게 전화를 했다. 강 장관은 격리를 풀거나 완화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기는커녕 “중국의 방역 경험으로 볼 때 적시 통제와 불필요한 인원의 해외 이동을 줄이는 게 전염병 확산 저지에 가장 중요하다”는 훈계를 들어야 했다.
 
왜 우리는 처음부터 이런 원칙을 고수하지 못했던가. 시진핑 방한과 한·중 관계 우선 논리에 방역의 논리가 뒤로 밀렸기 때문이다. 중국 전역에서 확진자가 속출하던 초기에 전면적인 중국인 입국 금지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은 두고두고 남을 화근이다.
 
정부는 중국인 입국 제한과 코로나 확산의 인과관계를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홍콩의 사례는 좋은 참고가 될 수 있다. 중국과의 관계를 놓고 보면, 홍콩은 우리보다 중국인 입경을 제한하기가 훨씬 더 어려운 관계에 있다. 홍콩 경제는 중국과 한 몸이고 주민들은 전철과 자동차로 당일 쇼핑을 왔다 갔다하는 일일 생활권이다. 홍콩 정부의 지도부는 선출 과정에서부터 중국 공산당의 낙점을 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콩 정부는 눈 딱 감고 중국의 입국을 일찌감치 끊었다. 2003년 사스(SARS) 때 거의 2000명이 감염되고 299명이 숨진 경험이 중국인 차단이란 결단을 재촉했다. 그 결과 현재 홍콩은 코로나19 확진자 120명에 사망자는 3명뿐이다.
 
만일 정부가 코로나 초기 중국인 입국에 강력한 조치를 단행했다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피해를 상당히 줄일 수 있었을 것이란 추정을 뒷받침하는 사례다. 그리고 시진핑 주석이 인민전쟁 승리를 선언하는 지금, 우리 정부가 중국의 방역 실적을 평가하며 다른 나라에 앞서 중국인 입국제한 조치 해제를 발표한다고 가정해보자. 원칙은 원칙대로 지키고 피해는 극소화하면서도 정부가 오매불망하는 한·중 관계 개선의 효과는 극대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스크 대란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정부에 과도한 기대를 건 것인지도 모르지만, 이 대목이 두고두고 아쉬울 따름이다.
 
예영준 논설위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