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수대] 징비록을 읽다

중앙일보 2020.03.12 00:13 종합 29면 지면보기
한애란 금융팀장

한애란 금융팀장

1592년 임진왜란 초기 일이다. 순변사 이일은 상주에서 머물며 군대를 조직했다. 저녁 무렵, 개령 사람 하나가 와서 “적이 코 앞에 왔다”고 알렸다. 이일은 “거짓으로 민심을 현혹시킨다”며 그의 목을 베려 했다. 그러자 그는 “내일 아침에도 적이 오지 않으면 그때 죽이라”라고 말했다. 다음날 날이 밝자 이일이 “아직 적의 그림자도 볼 수 없다”며 그의 목을 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총을 앞세운 적의 공격이 시작됐다. 이일은 적을 피해 옷도 벗어던진 채 달아나야 했다.
 
선조가 평양으로 피난해있을 때다. 임금이 곧 평양을 버릴 거란 소문이 퍼지자 백성들이 도망가 마을이 텅 비었다. 임금은 세자를 시켜 평양을 지킬 것임을 전하게 했다. 백성들은 믿지 않았다. 다음날 할 수 없이 임금이 대동관 문에 나가 승지를 통해 “평양을 반드시 지킬 것”이란 말을 전했다. 그러자 숨어있던 백성들은 모두 돌아왔다. 이미 대동강변에 적이 출몰하던 때였다. 사실 그 전부터 대신들은 평양을 버리고 떠날 것을 청해왔다. 결국 며칠 뒤 선조는 평양을 떠나 영변으로 향했다.
 
“지금 읽으니 가슴에 와 닿는 것이 많다”는 취재원 추천에 류성룡의 『징비록』을 펼쳐봤다. 전쟁 초기를 다룬 책의 절반까지는 답답하고 한숨 나오는 장면만 이어진다.
 
지금 상황을 500여 년 전 처참했던 전쟁에 비유하는 건 무리다. 그래도 취재원이 말하려던 것이 무엇인지 알겠다.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한 정부 대응, 특히 위기소통의 문제가 저절로 떠오른다. 조금이라도 부정적 전망을 내면 ‘불안을 부추기는 가짜뉴스’로 낙인 찍고, 국민을 안심시킨다는 이유로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내놓은 것이 그렇다.
 
닮은 점이 또 있다. 진짜 적과 싸우기보다는 국가적 위기를 반대파 공격의 기회로 삼는데 골몰하는 정치인 모습이 그대로다.
 
징비록을 읽다 보면 초반엔 분통이 터지다가 중반 이후엔 울컥한다. 이순신의 활약도 그렇지만 한두 문장 씩 언급되는 의병들 이야기가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코로나19와 맞서는 최전선에 선 의료진과 자원봉사자, 마스크 대란에도 버텨주는 약사들, 생필품 공급선인 택배기사들. 많은 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 점도 닮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한애란 금융팀장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