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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의 골프 인사이드]플레이어스 챔피언십의 악마 설계가

중앙일보 2020.03.10 11:36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이 열리는 TPC 소그래스 17번 홀. [AFP=연합뉴스]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이 열리는 TPC 소그래스 17번 홀. [AFP=연합뉴스]

1982년 PGA 투어 ‘제5의 메이저’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에서 제리 페이트는 우승이 확정되자 커미셔너인 딘 비먼과 코스 설계자인 피트 다이를 그린 옆 호수에 밀어 빠뜨려 버렸다. 그리곤 자신도 물에 뛰어들었다. 
 
이 사건은 LPGA 투어 메이저인 ANA 인스퍼레이션 우승자가 물에 뛰어드는 ‘호수의 여인’ 세리머니의 시조가 된다. 그러나 ANA 우승자처럼 기뻐서 물에 뛰어든 건만은 아니었다. 호수엔 악어도 있었다.
 
대회 시작부터 코스 때문에 말이 많았다. PGA 투어는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을 기존 메이저대회를 능가하는 최고 대회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래서 관중들이 경기를 잘 볼 수 있고, 방송 중계에도 완벽하고, 선수의 기량을 테스트할 변별력을 갖춘 스타디움 골프장을 기획했다.  
 
설계는 피트 다이가 했다. 다이는 골프장을 몹시 어렵게 만든다. 그가 처음 만든 골프장은 9홀짜리였는데 물을 13번이나 건너야 했다. 악마 같다는 별명도 있다.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이 열리는 TPC 소그래스는 물이 많다. 그린은 작고 경사가 심하며 딱딱했다. 다이 특유의, 철도 침목을 이용한 깊은 벙커도 선수들을 괴롭혔다.
 
대회를 앞두고 평가는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막상 1라운드가 끝나자 난리가 났다. 너무 어려워 기권한 선수가 9명이나 됐다. 80대 타수를 친 선수는 25명이었다. PGA 투어의 베테랑 기록원은 “내가 본 역대 최악의 스코어”라고 했다.  
 
톰 왓슨은 “그린을 갈아엎어야 한다”면서 “불도저를 가지고 다녀도 되느냐”고 물었다. 한 선수는 “17번 홀은 X이다”고 했다. 대회 전 골프장을 칭찬했던 잭 니클라우스도 말을 바꿨다. 그는 “5번 아이언으로 자동차 보닛에 공을 쳐(롱아이언으로 딱딱하고 경사진 그린을 공략해) 본 적이 없는데 여기가 그렇다”고 말했다.
 
호수에 공이 빠질까봐 노심초사하며 우승한 페이트는 “설계자도 수영을 좀 해야 할 것”이라며 물에 빠뜨렸다. 기자들이 페이트에게 “우승 상금으로 받은 9만 달러 수표가 젖으면 어쩔 뻔했느냐”고 묻자 “돈을 잘 보관해서 골프장을 새로 만들 비용으로 쓰려 했다”고 했다. 
 
완전히 농담만은 아니었다. 선수들의 강력한 반발에 대회 후 코스를 개조해야 했다. 야수 같던 골프장은 이빨이 뽑혔다.  
 
다이의 코스가 어렵긴 하지만 최고 선수들에게 난공불락은 아니다. 당시 페이트의 우승 스코어는 8언더파였으니 경기를 할 만했다. 문제는 압박감이다. 다이는 시각적 압박감을 이겨내느냐를 주요한 포인트로 봤다. 
피트 다이가 2012년 자신이 설계한 휘슬링 스트레이츠 골프장에서 열린 PGA 챔피언십 기자회견에서 포즈를 취했다. [AP=연합뉴스]

피트 다이가 2012년 자신이 설계한 휘슬링 스트레이츠 골프장에서 열린 PGA 챔피언십 기자회견에서 포즈를 취했다. [AP=연합뉴스]

 
TPC 소그래스의 아일랜드 그린 17번 홀이 대표적이다. 135야드로 짧아 주위에 물이 없다면 선수들이 그린에 올리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을 홀이다. 그러나 선수들도 물과 바람에 벌벌 떨면서 수 많은 공을 호수에 빠뜨렸다.

 
다이는 자서전 『나를 항아리 벙커에 묻어주오』에서 “선수들이 급진적인 디자인을 낯설어했다”며 “TPC 소그래스는 쉽게 바꾸는 바람에 빛을 잃었다”고 회고했다.   

 
1994년 그렉 노먼이 24언더파로 우승했을 때 코스가 너무 쉽다는 비판이 나왔다. 2018년 우승 스코어는 18언더파, 2019년 16언더파였다.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은 올해 상금을 1500만 달러로 늘렸다. 그러나 돈으로 메이저를 살 수는 없다. 82년 우승자 페이트처럼 설계가에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치르는 대회였다면, 보는 사람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경기였을 것이다.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은 유사 메이저가 아니라 진짜 메이저 대회로 올라서지 않았을까.
 
소그래스에 명물로 남은 것은 17번 홀이다. 골프에서 가장 많이 사진이 찍히는 홀이다. 누군가 "X"라고 했던 그 홀이 소그래스를 지킨다. 다이는 TPC 소그래스 이외에도 박세리가 1998년 US오픈에서 우승한 블랙 울프런, 키와와 아일랜드, 휘슬링스트레이츠 등을 설계했다. 천재 설계가는 지난 1월 세상을 떠났다.
 
골프팀장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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