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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현의 시선] 미안해, 5년 전과 똑같아서

중앙일보 2020.03.06 00:19 종합 28면 지면보기
김승현 논설위원

김승현 논설위원

젖은 손이 애처로워 살며시 잡아본 순간, 거칠어진 손마디처럼 종이 날이 만져졌다. 아내는 아침 일찍 동네 약국에서 받은 마스크 구매용 번호표를 쥐고 있었다. 야근으로 늦잠 잔 게 미안했지만, 오히려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에이, 아직 마스크 남아 있잖아….”

아내는 마스크 구하러 동분서주
말뿐인 가장은 계획·디테일 없어
무책임한 ‘코로남불’ 사과합니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아내. 핀잔은 한 귀로 흘렸다. 아무 생각 없이 입만 나불댄 게 하루 이틀인가. ‘마스크 대란’ 상황에도 매일 새 마스크 쓰는 게 누구 덕인데…. 님의 침묵 앞에 어느새 자아비판을 하고 있었다.

 
아내는 한 달 보름쯤 전부터 바지런히 움직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아직 우한 폐렴으로 불리고 있을 때다. 중국 확진자는 100명을 넘지 않았고, 춘절에 확산이 우려된다는 경고가 이어졌다. 노스트라다무스가 빙의한 듯 “중국인을 막아야 한다”던 아내는 뜻대로 안 되자 마스크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한국도 곧 우한처럼 된다”면서다. 모바일로 처음 주문한 마스크 20개(KF94)의 가격은 1만원이 조금 넘었다. 개당 500원 정도다. 이후 밤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주문서를 입력했다. 아침이면 마스크와 손 세정제, 일회용 비닐장갑, 알코올 솜이 문 앞에 배달됐다. 아내 지시로 양가 부모님 댁에도 마스크를 박스째 갖다 드렸다.

 
데자뷔처럼 5년 전 기억이 떠올랐다. 메르스가 한국을 휩쓴 그때도 아내는 평균 이상의 경계심을 보였다. 그게 못마땅했다. 지인 상가에도 못 가게 해서 싸웠고, 야근이라고 거짓말하며 문상을 했다. 국내 최고 병원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걸 목격하고서야 아내 말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경계의 수위를 높이는 게 옳다는 취지로, 메르스 상황에 허둥대는 박근혜 정부를 질타하는 칼럼도 썼다. ‘공포심에도 개성이 있다’는 제목이었다. 박근혜 정부는 메르스 피해 상황을 투명하게  알리지 않으면서 정작 위험에 노출된 국민에게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라’고 했다. 그 이율배반을 향해 “겁 많은 국민은 바보인 줄 아느냐”고 꾸짖었다.

 
문득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몰려왔다. 코로나19 앞에 떨고 있는 그를 다시 ‘겁 많은 국민’으로 대했기 때문이다. 손 씻을 때 ‘퐁당~퐁당~돌을~던지자~’를 완창(30초 동안 손 씻기)하는 건 오버라고 생각했다. 스마트폰을 알코올 솜으로 닦는 일도, 지하철에서 일회용 장갑을 끼는 것도 부끄러웠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볼펜으로 누르라는데도 매일 깜빡하고 있다. "적당히 해라”라고 반항도 했다. 본전도 못 건졌지만, "조심성으로는 보건복지부 장관님”이라 비꼬았다.  
 
눈앞에 위기가 창궐하기 전까지 왜 심각성을 먼저 인식하지 못했을까. 왜 내 가족의 걱정을 남의 불안처럼 여겼을까. 메르스엔 ‘메르남불(남의 불안)’, 코로나19엔 ‘코로남불’이었을까. 과거 아내가 일깨워 준 경계심은 메르스 종식이란 말을 듣자마자 곧장 사라졌던 것 같다. 5년이 지나 다시 잘못을 인지하기까지는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아내가 추가 주문한 각종 안전 상품의 배달이 취소되고 있었다. 인터넷에선 마스크 업자들의 바가지 상술, 가짜 알코올 솜 사기 등 코미디 같은 현실이 펼쳐졌다. 코로나19 확진자는 6000명을, 사망자는 40명을 넘었다. 대통령은 "마스크를 충분히 공급하지 못해 송구스럽다”고 했다. 수십 개의 마스크를 가진 게 이토록 든든한 일이 될 줄이야.

 
가족 셋이 매일 쓰다 보니 많아 보였던 마스크도 부족하게 느껴졌다. 아내는 "당신 잔소리 때문에 더 사지 못했다”고 원망했다. 아침에 약국을 찾은 것도 그래서였다. 번호표를 반납하고 마스크 2개를 3000원에 샀다고 했다. 아내는 이제 장기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관습법상) 가장은 또 한발 늦었다. 마스크 재고도, 하루 사용량도 따져보지 않았다. 이솝우화 속 개미와 베짱이가 따로 없었다.

 
가족 안전을 확보하는 매뉴얼은 누가 만들어야 하나. 남편과 아내, 아빠와 엄마의 역할이 따로 없지만, 나 몰라라 한 가장의 직무유기는 ‘빼박’ 유죄다. 생각 없이 말만 앞세우고 마스크 개수 따위엔 신경도 안 썼다. 다 괜찮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무능일 뿐이다. 그것도 5년 전 전철을 되밟았으니 가중처벌감이다. 리스크 관리에 계획이 없었음을, 안전 보장을 위한 단 하나의 디테일도 챙기지 못했음을 반성하고 사과한다.

 
아내가 마스크를 사두지 않았다면, 30초 손 씻기를 채근하지 않았다면, 일회용 마스크를 3일 이상 쓸 수 있게 열심히 말리고 있거나 어딘가 한적한 곳에 격리돼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리 조심해도 닥쳐올 수 있는 예측불허의 위험 앞에서 5년 전과 똑같았던 가장의 ‘코로남불’이 아내와 딸에게 정말 미안하다.
 
김승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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