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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지금은 이교도 공격보다 생명 살리는 일에 마음 모을 때

중앙일보 2020.03.05 00:13 종합 29면 지면보기
송길원 청란교회 담임 목사 하이패밀리(NGO) 대표

송길원 청란교회 담임 목사 하이패밀리(NGO) 대표

서기 165년부터 180년, 고대 도시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수백만 명의 로마 시민이 죽었다. 로마에서 발생한 ‘안토니우스 역병’ 탓이었다. 파르티아와 전쟁을 마치고 로마로 돌아온 병사들이 병균을 전파했다.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121~180년)도 쓰러졌다. 적군이 아니라 전염병 앞에 무릎을 꿇었다. 비참한 최후였다.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일수도
교회 시설 내놓고 봉사자 모으자

70년이 지난 251년 말. 또다시 전염병이 덮쳤다. 데시우스의 박해로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희생을 치르고 있을 때였다. 이교도들은 잔인했다. 전염병은 종교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 거리는 이교도와 그리스도인들의 시체가 뒤섞여 나뒹굴었다. 부유한 이교도들은 달아났다. 남은 자들은 서로 경계의식을 풀지 못했다. 감염자와의 접촉을 피했다. 죽음의 그림자가 세상을 뒤덮었다.
 
죽음의 공포 속에 떨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교부 키프리안(Cyprian)이 소리쳤다. “우리가 단지 우리(그리스도인)만을 소중히 여기고 우리끼리만 자비를 베푼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관용을 베푸신 것 같이 관용을 베풀자.” “원수도 사랑하자.” “주님께서 권고하신 대로 핍박하는 자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자.”
 
그의 설교는 울림이 컸다. 그리스도인은 일어섰다. 그들도 두려움이 없지 않았다. 두려움보다 더 큰 것은 사랑의 실천이었다.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시신을 거둔다. 병든 자들을 품는다. 노약자들을 돌본다. 주머니를 털고 집을 내놓는다. 자신을 핍박했던 이교도들에게도 기꺼이 손을 내민다. 눈물겨운 헌신이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사람들은 ‘파라볼라노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위험을 무릅쓰는 자’란 뜻이다. 그들 파라볼라노이 덕분에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건진다. 사랑의 기적이었다.
 
2007년 4월. 미국 버지니아 공대 총기사고는 끔찍했다. 33명이 목숨을 잃었다. 총기 난사범 조승희가 대한민국 국적자란 사실 때문에 우리 모두 가슴을 졸였다. 보복이 두려웠다.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의 자리, 32명의 희생자와 함께 끝자락에는 조승희의 이름도 있었다. 그리고 거기 놓인 꽃 한 송이가 던지는 메시지는 너무도 강렬했다. 조승희도 한 사람의 희생자라는 것이다.
 
추모의 글은 온 세계 시민을 울렸다. “조, 너는 우리의 힘, 용기, 그리고 인정을 대단히 과소평가했어. 너는 우리의 마음을 부쉈지만, 우리의 정신을 부수지는 못했어. 우리는 예전보다 더 강하고 더 많은 자부심이 생겼어. 사랑은 마지막까지 승리할 거야.”
 
코로나19로 온 국민이 떨고 있다. 병원과 공공시설은 ‘코로나 난민’으로 넘쳐나고 있다. 무엇보다 코로나19 감염자 접촉으로 자가 격리된 장애인들이 걱정된다. 인력·생필품도 부족한 상황이다. 방역하던 공무원들도, 의료인들도 지쳐간다. 코로나19도 무서운데 SNS를 통한 허위와 혐오의 ‘정보 바이러스’는 더 무섭다. 남 탓이 난무한다.
 
코로나바이러스를 퍼뜨린 주범(?)으로 지금 신천지 이교집단을 향한 무차별 공격이 난무한다. 하지만 신천지 신도들을 신상털기 한다고 바이러스가 멈출 것 같지는 않다. 심판은 나중 일이다. 지금은 생명을 살리는 일에 마음을 모아야 한다. 신천지에 속아 넘어간 그들도 피해자 아닌가.
 
원망을 거두자. 그래야 답을 찾을 수 있다. 지금은 정직한 절망만이 희망의 시작일지 모른다. 코로나19를 이겨낸다고 끝은 아닐 것이다. 전염병은 이제 더는 불청객이 아니다. 언제라도 다가올 수 있는 반갑지 않은 방문객일 것이다. 위기일수록 교회가 나서자. 의료봉사단을 꾸리고 자원봉사자를 모으자. 교회 시설을 내놓자. 세상이 또다시 ‘파라볼라노이’를 찾고 있다. 우리는 안다. ‘소망은 고난보다 장수한다’는 소중한 진실을.
 
송길원 청란교회 담임 목사·하이패밀리(NGO)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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