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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여걸 김지미 “남자는 어린애, 항상 부족한 존재더라”

중앙일보 2020.03.03 00:26 종합 23면 지면보기
신상옥 감독의 ‘대원군’(1968)은 ‘연산군’(1962)을 잇는 한국 사극의 대표작이다. 김지미의 존재감도 돋보인다.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신상옥 감독의 ‘대원군’(1968)은 ‘연산군’(1962)을 잇는 한국 사극의 대표작이다. 김지미의 존재감도 돋보인다.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배우.”
 

빨간 마후라, 후회 없이 살았다 - 제132화(7660)
<31> ‘치마 두른 남자’ 김지미

서구적 외모 ‘한국의 리즈 테일러’
네 번의 결혼, 자기 길 잃지 않아
‘대원군’‘불나비’ 등에 함께 출연
YS·DJ 앞에서 줄담배 피우기도

배우 김지미(80)를 둘러싼 말은 많지만 그 중 으뜸을 꼽으라면 ‘당당함’이다. 김지미는 그 어떤 배우들보다 당차고 씩씩했다. 오죽하면 ‘1960년대 최고 미녀 배우’가 ‘치마 두른 남자’로도 통할까.
 
김지미와 함께한 작품 중에 ‘대원군’(신상옥 감독·1968)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조선 말기 철종 시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극성을 부리자 왕족 흥선군(신영균)은 야인으로 위장해 방탕한 생활을 한다. 그때 흥선군의 가치를 알아본 이가 기생 추선(김지미)이다. 훗날 대원군이 권좌에 오르자 추선은 조용히 사라진다. 미스터리 스릴러 ‘불나비’(조해원 감독·1965)에서는 뭇 남성을 파멸시키는 팜므 파탈로 나왔다.
 
김지미는 활발하고 사교적이다. 내가 갓 데뷔했을 때 그와 이빈화가 나를 한 파티에 데려간 적이 있다. 여럿이 모인 술자리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당대 최고 배우들의 초청이었기에 동행한 기억이 난다. 이미 가정이 있었던 나는 구설에 오르지 않도록 자기관리에 신경을 썼다. ‘사교계의 여왕’ 김지미는 지금도 “신 회장이 누구 험담하는 거 들어본 사람 있느냐”고 말하곤 한다.
 
‘대원군’은 한국 최초로 동시녹음을 시도했다. 김지미의 실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영화다. 60년대에는 후시녹음이 대세였다. ‘겹치기 출연’이 흔하다 보니 배우는 연기만 하고 대사는 성우가 맡았다. 초창기 김지미의 목소리는 성우 정은숙이 주로 녹음했다. 반면 연극 무대에서 기초를 닦은 나는 ‘연산군’ ‘빨간 마후라’ 등 주요 작품에서 내 목소리를 고집했다.
 
김지미는의 필모그래피는 압도적이다. 57년 ‘황혼열차’(김기덕 감독)로 데뷔해 ‘장희빈’(1961) ‘길소뜸’(1985) ‘티켓’(1986) ‘명자 아끼꼬 쏘냐’(1992) 등 40여년간 700여 작품에 출연했다. 세계영화사에서도 드문 기록이다. 86년 지미필름을 설립, 영화 제작에도 열정을 쏟았다.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1985). [중앙포토]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1985). [중앙포토]

김지미는 길거리 캐스팅으로 충무로에 들어왔다. 최은희·조미령·문정숙 등 동시대 여배우와 달리 서구적 외모와 당돌한 매력으로 혜성처럼 등장했다. 전후 서울을 배경으로 한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1959)에서 한국영화 최초로 양장 차림으로만 나와 화제가 됐다. 멜로드라마 여주인공들이 한복과 양장을 번갈아 입고 나오던 때였다. “김지미는 김지미인데 어디다 감히 비교하느냐”며 자신감이 넘쳤다.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별명도 생겼다.
 
김지미는 데뷔 1년 만에 홍성기 감독의 ‘별아 내 가슴에’(1958)로 스타덤에 올랐다. 그해 흥행 1위 기록을 세운, 손수건 없이는 볼 수 없는 신파 멜로다. 얼마 후 불과 열여덟 나이에 열두 살 연상 홍 감독과 결혼식을 올렸다. 훗날 “세상 물정도 모르던 시절, 영화를 찍는 건지 현실인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결혼식을 치렀다”고 회고했다.
 
김지미·홍성기 커플은 최은희·신상옥을 잇는 스타 감독과 배우의 만남으로 이목을 끌었지만 인연은 길지 않았다. 61년 ‘신상옥·최은희’ 커플과 동시에 ‘춘향전’ 영화를 개봉했다가 쓰디쓴 맛을 봤다. 이후 홍 감독이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사이가 멀어졌을 거란 관측이 나왔다. 남편의 빚 갚으랴, 영화 출연하랴, 가정 돌보랴 김지미가 전쟁하듯 버텨낸 시간이 짧지 않다는 걸 난 잘 알고 있다. 62년 9월 이혼을 발표하면서 “어차피 맞을 소나기”라며 담담해 했다. 이혼 직후 최무룡과의 스캔들이 터지면서 모든 게 덮여버렸지만 말이다.
 
김지미는 숨김이 없었다. 최무룡에 이어 나훈아, 이종구 박사까지 네 번의 결혼과 이혼 후에도 “살아 보니 그렇게 대단한 남자는 없더라. 다들 어린애였다. 남자는 항상 부족하고 불안한 존재더라”고 했다. 과연 김지미이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사생활을 꼬집는 사람도 있지만 모진 풍파에도 제 길을 걸어온 ‘여걸 김지미’를 응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지난해 11월 함께한 신영균·김지미. 김경희 기자

지난해 11월 함께한 신영균·김지미. 김경희 기자

김지미는 늘 “자신의 인생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 굽실거리지 말고 당당하게 살라”고 주장한다. 21세기형 여성의 맏언니쯤 된다.  
 
그의 화끈한 성격을 대변하는 일화가 있다. 90년대 영화인협회이사장 시절, 그는 청와대 초청 오찬 자리에서 김대중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을 앞에 두고 줄담배를 피웠다. 그가 한 대 피울 때마다 경호원들이 얼른 치우곤 했는데,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담배 피운다고 뭐라고 하면 ‘나는 가겠습니다, 나는 담배를 피워야 하는 사람입니다’ 하고 나오면 되지 내가 당황할 일이 뭐 있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김지미는 충무로 해결사 역할도 했다. 정진우 감독의 ‘국경 아닌 국경선’(1964)이 검열에 걸려 고초를 겪고 있을 때였다. 그는 김성은 국방부 장관을 찾아가 “이건 어디까지나 영화이고 창작의 자유는 보장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영화를 다시 한번 보세요”라고 설득해 결국 가위질을 면하게 했다.
 
신영균예술문화재단에서 해마다 수여하는 ‘아름다운예술인상’이 있다. 올해 10년째를 맞는다. 김지미는 지난해 시상식에서 공로예술인 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영화계에 머물다 가는 게 제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이런 아름다운 상을 제정해 주신 것에 대해 전체 영화계를 대표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김지미는 타고난 영화인이다. 배우로서나, 개인으로서나 파란만장한 세월 속에 오직 스크린만 생각해온 그에게 나 역시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정리=박정호 논설위원,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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