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후남 문화디렉터
그런 영광의 순간이 3주 전이 아니라 아득한 옛날 같다. 그사이 한국사회 전체가 재난영화처럼 변해버렸다. 엊그제 홍상수 감독의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 수상 소식에 환호하기에는 오늘도 코로나19의 확산세가 무섭다. 게다가 어느새 그의 개인사에 대한 관심은 그의 모든 영화가 받아온 관심을 압도한다. 수상작인 ‘도망친 여자’를 보지도 못했으니, 그의 또 다른 영화 제목처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번 작품을 논할 수는 없다. 그저 이번에도 거대 담론이 아니라 극 중 인물의 개인적 일상을, 제작비를 최소화하는 특유의 방식으로 만들었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제70회 베를린 영화제에서 ‘도망친 여자’로 감독상을 받은 홍상수 감독. [신화=연합뉴스]](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03/03/32b49b77-23c2-4938-8ed3-741c314f4825.jpg)
제70회 베를린 영화제에서 ‘도망친 여자’로 감독상을 받은 홍상수 감독. [신화=연합뉴스]
이런 면에서 봉준호와 홍상수는 대척점에 있는 것 같지만, 공통점도 있다. 한국영화의 주요 작가로 꼽히는 여러 감독들처럼 1990년 중반~2000년대 초에 데뷔했다. 지금 한국영화가 누리는 국제적 영광은 새로운 재능의 감독들에게 과감히 투자할 수 있었던 그때의 과거에 빚을 진 셈이다.
홍상수의 방식이 영화산업의 대안이라거나 새로운 표준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도 처음부터 그렇게 영화를 만들진 않았다. 요즘 젊은 감독 지망생들이 제2의 봉준호는 몰라도 이런 의미에서 제2의 홍상수를 꿈꾸는 경우는 별로 없을 것이다. 홍상수의 분투는 그래서 돋보인다. 할리우드가 장르 영화나 블록버스터 영화로 산업적 표준을 제시했다면, 프랑스의 평론가나 누벨바그 감독들은 카메라를 만년필에 비유하곤 했다. 개인적 표현의 수단이라는 점에서다. 한국영화의 미래를 논하려면 산업 논리와 개인 창의성 사이에 건강한 상호작용이 살아나야 한다.
이후남 문화디렉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