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희소병 친구 돕던 20대 취준생 죽음 내몬 보이스피싱범 잡혔다

중앙일보 2020.02.29 05:00
보이스피싱 조직에 속아 수백만원을 뜯긴 뒤 극단적 선택을 한 취업 준비생 김모(28)씨 아버지가 지난 12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린 글 일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캡처]

보이스피싱 조직에 속아 수백만원을 뜯긴 뒤 극단적 선택을 한 취업 준비생 김모(28)씨 아버지가 지난 12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린 글 일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캡처]

검사와 수사관이라고 사칭 후 20대 취업 준비생(취준생)에게 수백만원을 뜯어내 결국 죽음으로 내몬 보이스피싱(전화 금융 사기) 일당 중 인출책이 경찰에 붙잡혔다. 숨진 취준생은 마지막 순간까지 보이스피싱범을 검사로 믿고 본인 실수로 처벌을 받을까 두려움에 떨다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전북경찰청, 사기 혐의 인출책 검거
피해자 420만원 수거해 조직에 전달
유족 "선량한 피해자 없도록…" 호소
경찰 "총책 등 보이스피싱 일당 추적"

전북경찰청은 28일 “취업을 준비하던 20대 남성이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 그를 속이고 수백만원을 빼돌린 혐의(사기)로 보이스피싱 인출책 A씨를 불구속 입건했다”고 밝혔다. A씨는 지난달 20일 김모(28)씨가 서울의 한 주민센터 인근 택배함에 둔 현금 420만원을 수거해 조직에 전달한 혐의다. 경찰은 주민센터 인근 폐쇄회로TV(CCTV) 등을 분석해 이달 중순께 A씨를 검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에 따르면 전북 순창에서 취업을 준비하던 김씨는 지난달 20일 집을 나서면서 모르는 번호의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 남성은 “담당 검사가 누군지 아셔야 하니까 제 소개 잠깐 할게요. 여기는 서울지방검찰청 첨단범죄수사팀 팀장을 맡은 김민수 검사예요”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 남성은 “당신 계좌가 대규모 금융사기에 연루돼 일단 돈을 찾아야 한다. 수사가 끝나면 돌려주겠다”고 했다. 김씨는 수사관이라는 또 다른 남성과 번갈아 가며 통화했다.
 
이들은 e-메일을 통해 조작된 검찰 출입증과 명함까지 찍은 사진을 보내며 김씨를 안심시켰다. 그러면서도 전화는 끊지 못하게 했다. “본인 전화 꺼지면 바로 수배되고 체포영장 나가면 2년 이하 징역 처벌을 받는다”, “지금 (휴대전화) 배터리 잔량 몇 프로예요? 충전하시면서 조사받으세요”라고 협박했다. 또 “3일 동안 조사를 받으셔야 하므로 간단한 세면도구 챙겨오셔야겠죠. 본인의 혐의점이 발견된다면 구속된 상태에서 최대 법정 90일 동안 구속 수사를 (받는다)”고도 했다.
 
겁을 먹은 김씨는 정읍의 한 은행에서 현금 420만원을 찾았다. 사기단은 인출한 액수가 맞는지 인증 사진도 요구했다. 김씨는 KTX를 타고 서울의 한 주민센터 인근 택배함에 돈을 가져다 놓았다. 이 과정에서 김씨는 “지금 주변에 제3자 소리가 왜 계속 들려요? 자, 준비됐어요? 질문 사항 있어요? 입장할게요. 자, 입장하시고 걸어가세요. 자연스럽게…”라는 사기단 지시를 따랐다. 
 
김씨는 이들이 시키는 대로 인근 카페에서 기다렸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이 A씨 일당은 김씨의 돈을 챙겨 달아났다. 김씨가 이들과 통화한 시간은 무려 11시간이었다.

 
김씨는 숨지기 직전까지도 본인과 통화한 남성이 진짜 검사라고 믿었다. 그의 유서에는 ‘통화 중 전화를 끊어 검사님의 연락을 못 받아 공무집행방해죄를 받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본인이 일부러 전화를 끊은 게 아닌데도 검찰이 이를 이유로 공무집행방해죄로 처벌할 거라 믿고 두려워한 정황이다.
 
혼자서 괴로워하던 김씨는 설날 연휴를 하루 앞둔 지난달 22일 자신의 아파트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김씨는 대학 시절 희소병을 앓던 친구를 극진히 보살펴 학보사 등에서 미담 주인공으로 다룬 인물로 알려졌다.
 
애초 단순 변사 사건으로만 알았던 경찰은 장례식 이후 김씨 휴대전화에서 보이스피싱 조직에 속은 정황을 발견한 유족의 신고를 받고 수사에 착수했다. 김씨 휴대전화에는 보이스피싱 일당과 11시간 동안 통화한 녹음 파일이 남아 있었다. 
 
김씨 아버지는 지난 12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내 아들을 죽인 얼굴 없는 검사 김민수 잡을 수 있을까요?’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아들의 안타까운 죽음이 헛되지 않게 정부가 강력한 처벌과 재발 방지 수단을 마련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김씨 아버지는 “(아들이) 검사를 사칭한 이의 말씀이 두려워 친구나 친지·부모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다”며 “보통 이런 경우 어리숙했다고만 쉽게들 판단하지만 행정안전부 통계에 따르면 1년에 보이스피싱 피해자가 2만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선량한 피해자가 또 발생하지 않길 바란다”고 했다.
 
경찰 관계자는 “A씨가 누군가에게 피해자의 돈을 건넨 사실을 확인하고 총책 등 나머지 일당을 추적하고 있다”며 “수사 중이라 구체적인 내용은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