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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티베트 삼킨 강희·건륭제, 별장·사찰엔 정복자 꿈이…

중앙선데이 2020.02.29 00:20 675호 26면 지면보기

[중국 기행-변방의 인문학] 피서산장·외팔묘

청나라 건륭제는 광대한 몽골을 전부 복속시킨 기념으로 외팔묘의 하나인 보녕사를 세웠다. 사진은 보녕사의 관음보살 입상. [사진 윤태옥]

청나라 건륭제는 광대한 몽골을 전부 복속시킨 기념으로 외팔묘의 하나인 보녕사를 세웠다. 사진은 보녕사의 관음보살 입상. [사진 윤태옥]

청나라는 명나라와는 차원이 달랐다. 지배층이 한족에서 만주족으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청의 최대 판도(약 1315㎢)는 명나라(약 650만㎢)의 두 배나 됐다. 청은 중원을 정복했을 뿐 아니라 ‘또 다른 변방’인 남몽골(내몽골)·북몽골(몽골공화국)·서몽골(신장위구르자치구)과 티베트 전체(티베트 자치구와 칭하이성) 그리고 대만까지 포괄하는 광대한 제국을 이룬 것이다.
 

‘북·서 또 다른 변방’ 정복한 만주족
허베이성 청더에 피서산장 등 지어

무란위장은 1만㎢ 황제 전용 사냥터
강희제, 몽골 통제·친화 위해 북순

변방의 만주족이 ‘북과 서의 또 다른 변방’을 정복한 내력은 그들이 세운 허베이성 청더(承德)의 피서산장(避暑山莊)과 외팔묘(外八廟)를 유람하면서 음미할 수 있다. 피서산장은 황제가 북방을 지배하던 중심이고, 외팔묘는 사찰이면서도 만주-몽골-티베트를 정복한 역사의 기록관이다.
  
보타종승지묘엔 25m 높이 웅장한 대홍대
 
피서산장이란 명칭은 강희제가 지은 것이다. 나무 한 그루 없고 여름엔 뜨겁기만 한 자금성에 비교해 보면 피서란 말이 쉽게 수긍된다. 궁전은 담박경성전(擔泊敬誠殿)을 중심으로 전조후침(前朝後寢)을 갖추고 있고, 북쪽으로는 호수가 바로 닿아 있다. 궁전으로는 소박하지만, 호수 정원은 규모는 물론 디테일도 살아 있어 황제의 별장답다. 베이징의 이화원, 쑤저우의 졸정원, 유원과 함께 사대원림으로 꼽기도 한다.
 
외팔묘 중 처음 세워진 부인사. 몽골 왕공들이 내놓은 땅에 세웠다. [사진 윤태옥]

외팔묘 중 처음 세워진 부인사. 몽골 왕공들이 내놓은 땅에 세웠다. [사진 윤태옥]

외팔묘는 피서산장 동쪽과 북쪽을 둘러싸고 있다. 이들은 북쪽으로 150㎞ 거리에 있는 무란위장(木蘭圍場)과 조합을 이룬다. 무란위장은 1만㎢나 되는 황제 전용 수렵장으로, 내몽골 초원에 접하면서도 천리송림으로 우거진 최고의 사냥터다. 피서산장은 황제의 사냥을 위한 행궁인 셈이다. 황제는 몽골의 왕공 귀족들을 불러 사냥을 함께하고 연회를 베풀었다. 천연두를 극히 경계하여 베이징에 들어가기를 꺼렸던 몽골 수장들을 접견하는 상설 연회장이 바로 피서산장이었다.
 
만주족이 후금과 대청으로 흥기했던 것은 만주-몽골 동맹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누르하치 시대에 이미 몽골 일부가 복속해 오기 시작했다. 누르하치를 이은 홍타이지는 칭기즈칸의 적통 후계인 차하르부를 공격하여 릭단 칸을 사지에 몰아넣었다. 릭단 칸의 아들 에제이(?~1641)는 1635년 몽골 대칸의 상징인 전국옥새(傳國玉璽)를 바치면서 홍타이지에게 투항했다. 이것이 대청을 선포하고 황제를 자처한 중요 모티브가 된 것이다.
 
차하르를 포함한 남몽골 대부분이 복속해 왔으나 1675년 강희제 때 차하르부의 반란이 일어나 베이징과 선양까지 위협받았다. 남방의 삼번의 난을 평정하느라 분주하던 강희제는 이를 힘들게 진압해야 했다. 강희제는 몽골의 반란집단을 산시성 북쪽으로 이주시키고는 몽골 지배방식에 대해 고심했다. 몽골 통제를 강화하고 친화를 다지기 위해 북순(北巡)을 시작했다.  
 
1676년 첫 번째 북순을 했고 1681년 세 번째 북순부터 무란위장에서 대규모 사냥을 했다. 1683년부터는 몽골 왕공들을 수렵에 참여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북순과 수렵이 북방동맹을 견고하게 유지하는 국가적 방책으로 굳어진 것이다. 수렵장을 오가는 데 필요한 행궁은 초기에는 카라호톤(지금의 청더시 롼허진)이었다. 그러다가 새로 행궁을 짓기로 하고 1703년부터 5년간의 공사를 거쳐 피서산장을 1차 완성했다. 그 이후 건륭시대까지 수차례 증축됐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남몽골과의 동맹을 기반으로 북몽골·서몽골·티베트 등으로 통치영역이 확장됐다. 1691년 북몽골 칼카가 청에 복속해 왔다. 강희제는 1696~97년 세 차례나 몽골초원으로 친정하여 서몽골 준가르를 몰아붙였다. 마지막 유목제국 준가르는 물론 산악제국 티베트까지 복속시킨 업적이 외팔묘에 당당하게 기록되어 있다. 외팔묘(많게는 12개를 꼽기도 한다)를 건립 순으로 따라가면 강희제와 건륭제가 ‘또 다른 변방’을 정복한 역사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외팔묘 가운데 첫 번째 세운 것은 부인사와 부선사(현재는 없음)다. 강희제의 60세 생일을 맞으면서 몽골 왕공들이 자기들 땅을 내놓아 1713년 세운 것이다. 강희제를 이은 옹정제는 국가재정을 아끼면서 내치에 진력했다. 그는 무란위장으로 사냥을 가지도 않았고 피서산장에도 가지 않았다. 옹정 다음의 건륭제는 피서산장에 궁전을 추가로 세우고, 정복전쟁과 함께 외팔묘를 펼쳐 나갔다.
 
건륭제 초기 20년 가까이는 준가르와 정전상태였다. 그러다가 준가르 내부에 분란이 발생하자 이를 틈타 1755년 준가르를 정벌했다. 강희제 이후 약 70년간 이어온 준가르와의 상쟁에 승리한 것이었다. 광대한 몽골의 남-북-서 전부를 복속시킨 기념으로 보녕사(普寧寺)를 세웠다. 보녕사 정문 안쪽의 높은 비정(碑亭)에는 보녕사 건립비 좌우로 준가르 평정 기념비가 두 개 세워져 있다. 사찰이라지만 전승기념비가 주인인 듯하다. 보녕사는 건축양식도 정치적이다. 전반은 한족식이고 후반은 티베트식이다.
 
1760년에 보녕사 옆에 보우사를 세웠다. 신장 남부 타림분지에서 호자 형제가 주도한 회족 반란을 진압한 것과 함께 자신의 50세, 모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보우사는 1964년 화재로 전소되어 빈터만 남아 있다. 사찰만 둘러보다가 잘 보존된 빈터를 마주하니 역설적으로 볼 만하다는 느낌도 든다.
  
건륭제 정복전쟁 하는 동안 관리들은 부패
 
티베트 라싸의 포탈라궁을 본떠 지은 보타 종승지묘의 비. [사진 윤태옥]

티베트 라싸의 포탈라궁을 본떠 지은 보타 종승지묘의 비. [사진 윤태옥]

안원묘(安遠廟)는 1764년에 세웠다. 먼 곳을 정복했다는 이름부터가 정치적이다. 준가르의 내분 속에 다쉬다와 부족의 2000여 부중이 청에 귀순해 오자 이들을 열하로 이주시켰다. 이들이 참배할 사원으로 그들의 고향에 있는 쿨자사를 모방하여 지은 것이다. 천산 남북이 청조 판도에 들어왔다는 선언이 정전 바로 옆의 커다란 문전비(門殿碑)에 새겨져 있다. 1767년에는 카자흐족과 키르키즈족의 열하 방문을 기념해서 보락사(普樂寺)를 세웠다. 그들의 숙소로 사용됐던 곳이다.
 
1771년에는 건륭제의 60세 생일을 맞아 보타종승지묘(普陀宗乘之廟)를 세웠다. 라싸의 포탈라궁을 본뜬 것으로 ‘작은 포탈라’라고도 불린다. 외팔묘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진 25m 높이의 대홍대(大紅台)의 웅장함은 어디에 견주어도 빠지지 않는다.
 
보타종승지묘가 완공될 즈음에 또 하나의 정치적 사건이 발생했다. 150년 전에 준가르의 핍박에 밀려 볼가강 하구로 이주했던 서몽골의 토루구트가 청나라에 귀순해 온 것이다. 건륭제는 이들의 귀순을 받아들이면서 그 사실을 비에 새겨 정문 바로 안에 세웠다. 멀리 러시아 땅까지 이주해서 살던 티베트 불교의 마지막 부족까지 품어 들임으로써 티베트-몽골 전부를 복속시켰다고 선언한 것이다.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온 티베트의 6세 판첸 라마의 행궁 겸 강연장으로 지은 수미복수지묘. [사진 윤태옥]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온 티베트의 6세 판첸 라마의 행궁 겸 강연장으로 지은 수미복수지묘. [사진 윤태옥]

수미복수지묘(須彌福壽之廟)는 건륭 7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온 티베트의 6세 판첸 라마의 행궁 겸 강연장으로 1780년에 지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주족은 명나라와는 차원이 다른 동아시아 최대판도의 대청제국을 완성했다. 그러나 절정은 순간이다. 건륭제 전승의 이면은 심각했다. 전장에 엄청난 국부를 쏟아부었다. 건륭제가 먼 곳까지 정복하는 장대한 업적에 취해 있을 때 황제의 뒤꿈치에 붙어사는 관리들은 부패했다. 이제 만주족 역사기행은 끝에 다가왔다. 베이징에 들어선 영예와 아편전쟁 이후 쇠락의 역사는 베이징의 자금성에서 음미하기로 한다.
 
※ 도움말 이훈 만주사 연구자
 
윤태옥 중국 여행객
중국에 머물거나 여행한 지 13년째다. 그동안 일년의 반은 중국 어딘가를 여행했다. 한국과 중국의 문화적 ‘경계를 걷는 삶’을 이어오고 있다. 엠넷 편성국장, 크림엔터테인먼트 사업총괄 등을 지냈다. 『중국 민가기행』 『중국식객』 『길 위에서 읽는 중국현대사 대장정』 『중국에서 만나는 한국독립운동사』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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