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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자툰의 환대, 친대만파 간판 샤오이푸 마음 녹였다

중앙선데이 2020.02.29 00:20 675호 29면 지면보기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15〉

샤오이푸가 설립한 쇼브라더스는 린다이(林黛), 리리화(李麗華) 등 당대의 명우들을 배출한 동방의 할리우드였다. 저우룬파(周潤發), 류더화(劉德華), 량자오웨이(梁朝偉)도 훈련반에서 연기를 닦았다. 1960년대 말 해외 촬영 차 출국중인 쇼브라더스의 연예인. [사진 김명호]

샤오이푸가 설립한 쇼브라더스는 린다이(林黛), 리리화(李麗華) 등 당대의 명우들을 배출한 동방의 할리우드였다. 저우룬파(周潤發), 류더화(劉德華), 량자오웨이(梁朝偉)도 훈련반에서 연기를 닦았다. 1960년대 말 해외 촬영 차 출국중인 쇼브라더스의 연예인. [사진 김명호]

1972년 3월 8일, 유엔 주재 중국대사 황화(黃華·황화)가 비식민지화위원회에 홍콩과 마카오를 식민지 명단에서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 “모두 주지하는 것처럼, 홍콩과 마카오는 제국주의가 중국에 강요한 불평등 조약의 산물이다. 홍콩과 마카오는 영국과 포르투갈 당국에 점령당한 중국 영토의 일부분이다. 홍콩과 마카오 문제의 완전한 해결은 중국의 주권에 관한 문제다. 통상적인 식민지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반식민선언에 적용되는 식민지구 명단에 들어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그간 중국 정부는 조건이 성숙하면 적당한 방법으로 해결하겠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유엔은 이 문제를 다룰 권한이 없다.”
  

고향 저장성 이어 티벳 여행 길
의사·간호사까지 딸려보내 배려

샤오 “대만서 번 돈 대륙에 쓰겠다”
사재 8조원 중국 의료·교육에 기부

홍콩·마카오 친중파 거물도 챙겨
암에 걸리자 전국 명의 동원 치료

중·영 홍콩 반환 합의에 자본가들 불안
 
순찰중인 홍콩주둔 영국군. [사진 김명호]

순찰중인 홍콩주둔 영국군. [사진 김명호]

1975년, 중·영 양국은 1997년에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기로 합의했다. 1978년 여름, 신화통신 홍콩분사 사장으로 국가출판국장 왕쾅(王匡·왕광)이 부임했다. 왕쾅은 중국인이라면 초등학생도 다 아는 명문장가였다. 도착 첫날부터 방문 닫아걸고 고전만 뒤적거렸다. 홍콩 총독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성대한 환영연을 열었다. 왕쾅을 통해 중국의 의향을 떠봤다. “반환 이후, 자본가들이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는 희망적인 방안을 중국이 제시했으면 한다.”
 
며칠 후 왕쾅은 중공 중앙의 의견을 총독에게 전달했다. “19년이라는 긴 시간이 남아있다. 국제사회에 어떤 변화가 발생할지 예측할 수 없다. 현재 중국과 영국의 관계는 먹구름이 끼지 않았다. 양측에 모두 유리하다. 우리는 19년이 짧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투자를 저울질하는 자본가들은 고려해야 할 일이 많을 줄 안다. 1997년 홍콩이 조국의 품에 돌아오면 융통성을 발휘할 생각이다. 홍콩은 그들 특유의 자본주의를 유지하고, 우리는 우리의 사회주의를 견지하면 된다. 홍콩의 자본가나 투자를 희망하는 외국기업은 안심하기 바란다.”  
 
중국은 새로 발견한 별을 샤오이푸에게 기증했다. 명명식에 참석한 샤오이푸(왼쪽). 오른쪽은 당시 신화통신홍콩분사 사장 저우난(周南). 1990년 6월 1일 홍콩. [사진 김명호]

중국은 새로 발견한 별을 샤오이푸에게 기증했다. 명명식에 참석한 샤오이푸(왼쪽). 오른쪽은 당시 신화통신홍콩분사 사장 저우난(周南). 1990년 6월 1일 홍콩. [사진 김명호]

중국은 무슨 분야건 파벌이 있었다. 홍콩의 자본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광둥방(廣東幫), 상하이(上海)방, 푸젠(福建)방, 산둥(山東)방은 기본이고, 화교들도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출신지 별로 계파를 형성했다. 친영·친미·친대만·친일파 외에 식민지 초기 영국매판(買辦)으로 출발, 부와 명예를 축적한 명문세가(名門世家)도 한둘이 아니었다.
 
홍콩반환을 위한 중·영 회담이 시작되자 신화통신 홍콩분사는 각 계파의 대표적인 인물과 중공 중앙의 가교 역할을 했다. 창장(長江)그룹 설립자 리자청(李嘉誠·이자성), 선박왕 바오위강(包玉剛·포옥강)같은 거상들이 대륙을 방문, 중공 고위층과 안면을 텄다.  
 
문제는 친대만파의 간판격인 샤오이푸(邵逸夫·소일부)였다. 상하이 시장 장쩌민(江澤民·강택민)은 샤오이푸의 방문에 관심이 없었다. 낯 붉힌 채 수저우(蘇州)로 향했다는 말 듣고도 웃기만 했다. 수저우에서 쉬자툰(許家屯·허가둔)의 안내를 받은 샤오가 상하이를 경유해 고향으로 간다는 보고 받고도 시큰둥했다. 통전(通戰) 대상이라는 쉬자툰의 전화 받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성대한 만찬을 준비했다. 천하의 미식가 샤오의 입이 벌어질 정도였다. 고향 저장(浙江)성의 환대도 극진했다.
  
“대륙과 밀접해지면 상처받을 사람 많다”
 
1956년 1월, 광저우에서 허셴(오른쪽 첫째)을 만난 마오의 첫마디는 ’마카오왕 반갑습니다“였다. [사진 김명호]

1956년 1월, 광저우에서 허셴(오른쪽 첫째)을 만난 마오의 첫마디는 ’마카오왕 반갑습니다“였다. [사진 김명호]

홍콩에 돌아온 샤오이푸는 기분이 좋았다. 쉬자툰에게 중국의 깊숙한 곳을 가고 싶다며 티벳 여행을 요청했다. 쉬자툰은 쓰촨(四川)성 정부에 전문을 보냈다. “성 통전부장이 샤오이푸를 티벳까지 수행해라. 고령이다 보니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 의사와 간호사도 함께 가라. 아직은 우리보다 대만 쪽에 치우친 사람이다. 국민당이나 장징궈(蔣經國·장경국)에 관한 얘기는 입에 올리지 마라. 기자들의 접근도 차단해라. 본인의 요구다.”
 
샤오는 홍콩에 돌아온 날 저녁 쉬자툰을 방문했다. “호의에 감사한다. 의사와 간호사까지 배려할 줄은 몰랐다. 고원지대라 헉헉거리며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끄떡없었다. 간호사는 정말 미인이었다. 목소리도 예쁘고 노래도 일품이었다. 앞으로 틈만 나면 내지(內地) 곳곳을 여행하고 싶다.” 배석했던 부사장들이 베이징 방문을 권했다. “중앙의 고위층이 만나고 싶어한다.” 샤오이푸는 신중했다. “고맙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이유도 설명했다. “내 사업은 대만과 관련이 깊다. 대륙과 밀접해지면 대만에 상처받을 사람이 많다. 그간 대만은 돈을 버는 장소였다. 대륙은 다르다. 내가 돈을 써야 할 곳이다. 대륙은 빈곤지역이 많다. 어려운 곳에 가장 필요한 것은 교육과 의료시설이다.” 샤오이푸는 빈말을 하지 않았다. 2014년 107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우리 돈으로 현시가 8조 이상을, 그것도 회삿돈이 아닌 사재를, 중국의 대학 및 초중고 건물 6000여동과 병원 건설에 기부했다.
 
덩샤오핑은 훠잉둥(오른쪽)을 높이 평가했다. 1984년 2월, 베이징. [사진 김명호]

덩샤오핑은 훠잉둥(오른쪽)을 높이 평가했다. 1984년 2월, 베이징. [사진 김명호]

중공의 통전은 어설픈 정치가들은 흉내도 못 낼, 지혜와 교활함이 뒤섞인 인간미의 결정체였다. 신화통신홍콩분사는 새 친구 챙기느라 옛 친구를 등한시 하지 않았다. 마카오중화총상회 회장 허셴(何賢·하현)과 홍콩중화총상회 회장 훠잉둥(霍英東·곽영동)은 중공의 오랜 친구였다.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암 판정을 받았다.  
 
쉬자툰이 건의했다. “베이징에서 치료받기를 원하면 당 중앙과 국무원에 보고하겠다.” 훠잉둥은 동의하고 허셴은 미국에서 치료받기를 원했다. 중국 위생부는 훠잉둥의 치료에 전국의 명의들을 동원했다. 건강을 회복한 훠잉둥은 재생지덕(再生之德) 네자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별명이 마카오의 왕(王)이었던 허셴은 병마를 이기지 못했다. 귀국 후 세상을 떠났다. 영결식 날 쉬자툰이 직접 관 줄을 잡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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