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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예술] 회사원의 죽음, IMF 그리고 강남 부동산 투기: 한국 창작오페라의 힘

중앙일보 2020.02.28 00:13 종합 24면 지면보기
오희숙 서울대 음대 작곡과 교수

오희숙 서울대 음대 작곡과 교수

진정한 예술이란 참혹한 사회의 모습을 미메시스(모방)하며, 동시에 참혹한 삶을 거부하는 것까지도 담을 수 있어야 한다. 현대예술을 높이 평가했던 아도르노의 주장이다. 영화 ‘기생충’ 열풍을 보며 생각나는 말이다. 외면하고 싶은 비참한 현실은 영화뿐 아니라 음악에서도 중요한 화두였고, 모방을 넘어 사회 비판까지도 음악의 몫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이런 지점을 짚어주는 한국 작곡가들의 창작오페라가 대거 무대에 오르고 있다. 지난해 9월 공연된 작곡가 최우정과 극작가 배삼식의 ‘1945’는 해방 즈음 만주의 전재민 구제소를 배경으로, 위안부 분이와 미즈코의 연대와 인류애를 다뤘다.  
 
창작 오페라 ‘1945’의 포스터. [사진 국립오페라단]

창작 오페라 ‘1945’의 포스터. [사진 국립오페라단]

서양식 현대음악뿐 아니라 창가와 군가·국악 장단과 쿠프랭의 음악 등 시대와 문화를 넘나드는 음악으로 당대를 돌아보게 한 이 작품은 한국 창작오페라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최근에도 젊은 작곡가들의 오페라에 대한 열기가 뜨겁다.
 
창작 오페라 ‘김 부장의 죽음’. [사진 오페라 뱅크]

창작 오페라 ‘김 부장의 죽음’. [사진 오페라 뱅크]

‘김 부장의 죽음’(2월 5~8일)은 작곡가 오예승과 극작가 신영신의 작품이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한국식으로 각색, 1965년생 김영호의 삶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대학졸업 후 취직, 결혼, 그리고 승진까지 평범하게 살아온 김 부장은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를 장만한 삶의 정점에서 병을 얻고 죽어간다. 작곡가는 러시아 로망스, 세이킬로스 비문 선율, 찬송가, 동요 등을 인용하며 평범한 삶 속에서 개인이 겪을 수 있는 문제를 부각해 “이반 일리치의 과거는 지극히 평범했고 그래서 대단히 끔찍했다”는 톨스토이의 날카로운 지적을 실감나게 보여줬다.
 
작곡가 공혜린과 극작가 고연옥의 ‘까마귀’(2월 7~8일)는 IMF 문제를 다뤘다. IMF 여파로 가족은 동반 자살을 계획했지만 실패하고 이때 유기된 막내가 ‘까마귀’로 불리며 험난한 삶을 거쳐 가족을 만나는 이야기다. 대중에게 친숙한 선율로 어두운 사회 현실을 그린 이 오페라는 우리에게 가족의 의미를 묻게했다.  
 
작곡가 나실인과 극작가 윤미현의 ‘빨간바지’(3월 27~28일)는 빨간 바지를 입고 부동산을 누비며 투기를 했던 1980년대 말 강남 ‘복부인’들을 다룬다. 빈부의 격차라는 사회문제를 풍자와 해학으로 그리는 코믹 오페라의 면모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위안부, 평범한 회사원의 죽음, IMF 사태, 강남 부동산 투기. 뉴스나 신문에 자주 등장하는 기삿거리다. 그렇지만 오페라에서는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거창한 사회 문제는 개인으로 클로즈업되어, 개성적인 아리아와 듀엣, 섬세한 오케스트라 사운드로 덧입혀지며, 청중은 때로는 감정이입을 하며 몰입하기도 하고, 때로는 거리를 두고 사태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소박하지만 절절한 삶의 한 단면을 드러내며, 정교하게 세공한 창작오페라는 그래서 의미 있는 것이다.  
 
“예술작품은 개별적인 것, 미세한 것, 특수한 것, 개인적인 것을 드러내며 전체성과 일반성으로부터 오염되지 않은 독자성을 간직하게 된다”는 아도르노의 지적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런 점이 한국 창작오페라의 힘이 아닐까?
 
오희숙 서울대 작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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