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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볕 아스팔트에 배설물이 굴러도 행복했다, 난 순례자니까

중앙일보 2020.02.25 13:00

[더,오래] 박재희의 발로 쓰는 여행기(37)

순례는 여행이라고 해도 축제보다는 삶 자체와 닮았다. 좋은 날이 있으면 힘든 날이 있다. 어이없을 만큼 ‘되는 일이 없구나’ 싶다가도 터무니없이 행복해지는 날도 있는 것이다. 어제는 있을 수 없는 우연이 계속 겹치는 드라마 같은 날이었다.
 
땡볕을 걷는 순례자에게 얼음물과 사과를 나눠주려고 일삼아 기다리고, 그늘에 들어와 쉬라며 시에스타 시간에 공짜로 와인테이스팅에 초대받았다. 알록달록 컬러풀 우산으로 장식한 놀이를 즐겼고, 비행기 조종사 조안과 장애인 스키 코치 페이지와는 처음 만나 단 하루 만에 막역한 친구처럼 느낄 정도로 잘 통하고 잘 맞았다.
 
일본에서 온 70대 마라토너 부부. 걷고 뛰는 사람으로 지낸 20년을 감사하고 기념하려고 순례길을 걷는다고 했다. [사진 박재희]

일본에서 온 70대 마라토너 부부. 걷고 뛰는 사람으로 지낸 20년을 감사하고 기념하려고 순례길을 걷는다고 했다. [사진 박재희]

 
일본에서 온 70대 마라토너 부부도 있었다. 남편 야스히로가 55세, 부인 사치코가 50세가 되던 해부터 시작한 마라톤이 올해로 20년 차라고 했다. 걷고 뛰는 사람으로 지낸 20년을 감사하고 기념하려고 순례길을 걷는다고 했다. 선물 같던 날을 마감하는 밤이 새도록 포르투갈 모기에게 온몸을 바쳐 한국산 잔칫상을 차려주고 옆 침대에서 핀란드의 스테이시가 발사하는 우렁찬 연발 기관총 소리를 들어야 했다. 째려보기 염력은 스테이시에게 통하지 않아 난 촛농처럼 녹아내리며 뜬 눈으로 밝혀 새벽을 맞았다.
 
막판에 숲이 나오기 전까지 하루 종일 지루한 N1 도로를 걸었다. 아주 작은 알갱이만 한 기운도 한 톨 남지 않은 상태가 되었을 때 겨우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막판에 숲이 나오기 전까지 하루 종일 지루한 N1 도로를 걸었다. 아주 작은 알갱이만 한 기운도 한 톨 남지 않은 상태가 되었을 때 겨우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알버가리아노바(Albergaria-a-Nova)까지 22.3km로 막판에 숲이 나오기 전까지 하루 종일 지루한 N1 도로를 걸었다. 메마른 시멘트 길을 덮은 것은 까까(스페인어로 똥). '행운과 기쁨이 지나쳤으면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못마땅한 상황도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다. 자주 쉬고 더 웃으려 했지만 힘들고 어려운 날이었다. 아주 작은 알갱이만한 기운도 한 톨 남지 않은 상태가 되었을 때 겨우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침대를 배정받고 기절을 한 건지 잠이 들었던 건지는 불확실하다. 저녁 식당을 안내해 주는 호스피탈레로 소리에 눈을 겨우 떴다.
 
“난 단 한 발짝도 못 걸어.”
100m쯤 걸어가면 식당이 있다는 설명에 조안이 절박하게 외쳤고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굶으면 굶었지 한 걸음도 뗄 수 없을 것 같은 완전 방전의 상태였다. 냉장고에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여인 말대로 순례자들이 남겨둔 것이 있었다. 토마토케첩에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소스를 섞어 볶고 마카로니와 스파게티 면을 삶아 국적 불명 짜파구리를 만들어 먹었다.
 
‘비교하는 마음에는 행복이 깃들 수 없다.’
 
어디서 들은 말인 것도 같고 내가 마음속에서 만들어 낸 말인 것도 같은데 하여튼 진리다.
 
까미노가 처음이라는 청년 쟝은 하루하루가 환상이라며 감탄했다. 길에 매혹되어 걷다가 숙소를 못 잡고 노숙까지 했다고 깔깔웃는다.

까미노가 처음이라는 청년 쟝은 하루하루가 환상이라며 감탄했다. 길에 매혹되어 걷다가 숙소를 못 잡고 노숙까지 했다고 깔깔웃는다.

 
“이번이 네 번째 까미노인데, 정말 실망했어. 길이 좋지 않아.”
 
프랑스 리옹에서 온 이브를 만났다. 이브는 산티아고 프랑스길, 북쪽길, 은의길을 모두 걷고 마지막으로 포르투갈 루트를 걷는다고 했다. 까미노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며 매우 불만인 상태였다. 자동차가 쌩쌩 달리는 길을 걷고, 공단을 지나고, 길에는 똥이 널려있고…. 내가 불평했던 것들인데 막상 그 불평불만을 듣고 있자니 기분이 언짢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멋진걸. 걷는 것이 너무 행복해.”
 
까미노가 처음이라는 청년 쟝은 하루하루가 환상이라며 감탄했다. 길에 매혹되어 걷다가 숙소를 못 잡고 노숙까지 했다고 깔깔웃는다. 조안과 페이지도 이번이 처음이다. 그들도 길을 걸으며 모든 코너에서, 모든 만남에서 매번 기쁨을 발견한다. 까미노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이 없는 사람은 매 걸음이 새롭고 축복이라는데, 이전의 경험과 비교하며 다른 까미노에서 알게 될 것을 기대한 이들은 불만이 많았다. 경험이 독이고 비교하는 마음이 악마인 셈이다.
 
“1.8m의 법칙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뇌과학심리학자의 실험에 따르면 1.8m 반경에 있는 사람의 감정은 서로 전염되는 경향이 있대”
 
같은 공간에 있으면 하품만 옮는 게 아니라 감정과 정서도 옮아 비슷해진다는 것이다. 정말 그랬다. 감정은 전염되는 것이다. 인도가 없는 대로를 걸어야 한다고, 폭신한 흙길이 아닌 시멘트 길 때문에 발에 물집이 생긴다고 불평을 했는데 행복한 사람과 함께 걷다 보니 불만은 어느새 사라졌다. 아스팔트 포장도로와 말과 개의 배설물이 구르는 좁디좁은 인도를 용납한 지 오래고 프랑스 길에는 없는 스프(sopa)와 에그타르트(nata)를 먹을 수 있다. 하여 난 행복했다.
 
마데이라(Sao Joao da Madeira)에서 숙소를 잡는 일은 고생스러웠다. 헤매다 병원에서 순례자에게 내주는 무료 시설에 있다고 해서 들어와 보니 딱 옛날 영화에서 본 듯하다.

마데이라(Sao Joao da Madeira)에서 숙소를 잡는 일은 고생스러웠다. 헤매다 병원에서 순례자에게 내주는 무료 시설에 있다고 해서 들어와 보니 딱 옛날 영화에서 본 듯하다.

순례자로 300㎞를 넘게 걸으며 받은 축복이란 것이 있다면 세상에 작고 보잘것없던 것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능력이다. 길가에 자라는 가을 고추가 장미보다 아름답지 않다고 할 수 없었다.

순례자로 300㎞를 넘게 걸으며 받은 축복이란 것이 있다면 세상에 작고 보잘것없던 것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능력이다. 길가에 자라는 가을 고추가 장미보다 아름답지 않다고 할 수 없었다.

 
마데이라(Sao Joao da Madeira)에서 숙소를 잡는 일은 고생스러웠다. 헤매다 병원에서 순례자에게 내주는 무료 시설에 있다고 해서 들어와 보니 딱 옛날 영화에서 본 듯하다. 2차 세계대전 배경의 전쟁영화. 야전 병원에서 침대를 치워 버린 공간에 매트를 깔아두면 이럴 것이다. 재난 대피 시설을 연상시키는 방이었고 샤워장은 물이 잘 빠지지 않아 미끄럼으로 낙상 환자를 유치할 목적이라면 적합할 것 같았다.
 
‘아무리 무료라도 그렇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페이지가 눈을 반짝인다. “너무 힘들었는데 딱 숙소가 나타났지 뭐야. 게다가 무료라니 참 좋다.” 그의 말이 맞다. 볼멘소리하자면 끝이 없지만 감사할 일도 수두룩했다.
 
순례자로 300㎞를 넘게 걸으며 받은 축복이란 것이 있다면 세상에 작고 보잘것없던 것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능력이다. 길가에 자라는 옥수수, 가을 고추가 장미보다 아름답지 않다고 할 수 없었다. 보도블록 틈에서 겨우 피어난, 잡초라고 부르는 작은 생명을 밟지 않으려고 숨을 참으며 까치발로 걷는 그 마음을 선물로 받는다.
 
기업인·여행 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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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희 박재희 기업인·여행 작가 필진

[박재희의 발로 쓰는 여행기] 한량으로 태어나 28년을 기업인으로 지냈다. 여행가, 여행작가로 인생2막을 살고 있다.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여행하는 인간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 길을 떠나는 여행자다. 길에서 직접 건져올린 이야기, 색다른 시각으로 비틀어 본 여행기를 공유하고자 한다. 여정을 따라 함께 걸으며 때로는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이야기, 생생한 도보 여행의 경험을 나누며 세상을 깊이 여행하는 길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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