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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칼럼] 정치만 빼고

중앙일보 2020.02.25 00:53 종합 31면 지면보기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방탄소년단(BTS)의 새 앨범이 전 세계 아이튠스 차트 1위를 휩쓸었다. 지난주 BTS가 내놓은 정규 4집 앨범 ‘맵 오브 더 소울(MAP OF THE SOUL): 7’은 발매와 동시에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 브라질, 사우디아라비아 등 전 세계 91개국의 아이튠스 ‘톱 앨범’ 차트에서 1위에 올랐다. BTS 앨범 사상 최고 기록이다. 새 앨범의 타이틀곡인 ‘온’(On)은 83개 국가의 아이튠스 ‘톱 송’ 차트에서 1위를 석권했다. 특히 미국과 영국의 ‘톱 송’ 차트에서는 ‘온’ 이외에 ‘필터(Filter)’ ‘라우더 댄 밤즈(Louder than bombs)’ ‘친구’ ‘시차’ 등 수록곡 대부분이 차트에 진입하는 기염을 토했다.
 

세계 사로잡은 기생충과 BTS
한국 브랜드 가치 올라갔지만
정부의 방역 실패가 실추시켜
정치만 빼고는 다 잘하는 나라

도널드 트럼프가 한국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상 수상에 아닌 밤중 홍두깨식으로 어깃장을 놓았지만, 미국에서 기생충의 흥행 열기는 식지 않고 있다. 24일 박스오피스 집계 사이트 모조에 따르면 기생충은 지금까지 북미 시장에서 4894만 달러(595억원)의 흥행 수입을 올렸다. 북미에서 개봉한 외국어 영화 가운데 ‘와호장룡’, ‘인생은 아름다워’, ‘영웅’에 이어 역대 4위의 흥행기록이다. 북미 이외의 지역에서는 1억5563만 달러(1894억원)를 벌어들여 총 2억458만 달러(2489억원)의 글로벌 흥행 수입을 기록 중이다. 기생충의 오스카 효과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일본에서도 기생충은 새 기록을 쓰고 있다. 지난달 10일 개봉 이후 지난 22일까지 약 22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입장료 수입은 30억 엔(약 325억원)을 넘어서 지금까지 일본에서 개봉한 한국 영화 중 1위에 올랐다. 오스카 4관왕 수상 소식이 알려지면서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장르가 BTS’인 음악, 그것이 우리가 하고 싶은 음악”이라고 인터뷰에서 밝힌 대로 BTS는 자신만의 장르를 만들어냈다. 봉준호 감독도 마찬가지다. 그는 특정 장르로 규정하기 어려운 ‘봉준호 장르’로 영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 기생충에는 드라마, 코미디, 스릴러 적 요소가 뒤섞여 있다. 자신만의 독창적 콘텐츠로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오른 것이다.
 
한국어로 된 영화와 음악이 오스카상을 석권하고, 음반 시장을 ‘올킬(all kill)’하는 현상은 이제 문화 콘텐츠에서 언어는 더이상 장벽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공감할 수 있고, 재미있고, 끌리는 영화나 드라마, 음악이라면 자막을 읽어야 하는 불편을 감수하고, 심지어 한국어를 배워가면서까지 반응하고 소비한다. 국적과 언어를 따지지 않는 초국적 문화 콘텐츠 소비 시대에 한국이 제대로 올라타 발군의 경쟁력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 문화 콘텐츠에 대한 폭발적 수요는 요즘 넷플릭스에 들어가 보면 실감할 수 있다. 한국 드라마와 영화의 비중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K팝에서 시작된 한류가 K드라마, K뷰티, K푸드를 거쳐 K무비로 이어지면서 이제 한국은 하나의 문화 아이콘이 되고 있다.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도 급격히 늘고 있다. 몇 마디라도 한국어를 할 줄 알고, 한국 음식을 즐기는 게 멋진 취향으로 인식되고 있다. 한국을 찾아 한복을 입고 한국 음식을 먹으며 찍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것은 요즘 세계 젊은이들의 유행이 됐다.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은 한국 상품에 대한 관심과 맞물리면서 한국의 브랜드 가치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산 TV와 세탁기, 스마트폰이 최고급 제품으로 대접받은 지는 이미 오래다. 뛰어난 품질과 디자인에 한류의 쿨한 이미지가 결합하면서 한국 문화와 경제는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 좁은 내수 시장을 벗어나 전 세계를 겨냥한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글로벌 전략을 바탕으로 디지털 시대에 재빠르게 편승해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상품과 콘텐츠를 만들어낸 결과다.
 
그러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대한 정부의 어설픈 대응으로 졸지에 한국은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확진자가 많은 나라가 됐다. 이스라엘 공항에서는 비행기에서 내리지도 못한 채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다. 심지어 감염병의 발원지인 중국의 언론으로부터 늑장 대응과 부실 대응을 지적받는 처지가 됐다. 기생충과 BTS가 애써 끌어올린 한국의 국가 이미지를 정부의 방역 실패가 실추시킨 꼴이다.
 
맹목적 진영 논리와 고집스러운 이념에 사로잡힌 문재인 정부의 유연하지 못한 대응이 코로나 사태를 키웠다. 중국 언론조차 한국의 선제적이고 과감한 대응을 촉구하는 마당에 혹시라도 시진핑(習近平)의 심기를 거스를까 겁나 중국에서 들어오는 외국인의 입국을 막지 못하고 있다. 경제도 중요하고, 외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국민의 안전이다. 우선순위를 잘못 짚은 정부의 오판이 국민을 사지(死地)로 내몰고 있다. 정치가 한국인의 발목을 잡고 있다. 정치가 쓸데없이 간섭하고 규제만 하지 않아도 한국은 경제도, 문화도 훨씬 더 잘 나갈 수 있다. 이만하면 한국은 잘하고 있다. 정치만 빼고.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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