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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김진규·최은희의 춘향전, 신귀식·김지미와 세기의 격돌

중앙일보 2020.02.25 00:31 종합 24면 지면보기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에 출연한 김진규·최은희.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에 출연한 김진규·최은희.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배우 김진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스크린의 신사’다. 그의 아내이자 배우인 김보애씨가 11년 전 남편을 기억하며 쓴 논픽션 『내 운명의 별, 김진규』에서 그렇게 불렀다. 가까이서 그를 지켜본 사람이라면 다들 공감할 만한 별명이다. 김진규가 1998년 골수암으로 우리 곁을 떠나면서 ‘스크린의 노신사’를 더는 볼 수 없게 된 게 안타까울 뿐이다.
 

빨간 마후라, 후회 없이 살았다 - 제132화(7658)
<29> ‘스크린의 신사’ 김진규

60년대 이지적 외모로 여심 잡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서 첫 만남
영화제작 잇단 실패로 힘든 말년
아내 김보애 ‘한국의 메릴린 먼로’

김진규는 1960년대 한국영화 중흥기를 이끈 간판스타다. 내가 영화 ‘과부’(1960)로 데뷔했을 때 그는 이미 5년 차 스타 연기자였다. 1955년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에서 인텔리 출신의 빨치산 역으로 데뷔한 후 ‘아빠 안녕’ ‘이 생명 다하도록’ ‘새엄마’ 등에 출연하며 이지적 이미지를 굳혔다.
 
5년 선배 배우이자 멋진 경쟁 상대 
 
김진규의 영화 중에서 ‘성춘향’(1961)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충무로에 갓 데뷔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였지만 나는 틈나는 대로 극장을 찾았다. 이 영화는 신상옥 감독과 김진규·최은희 콤비의 만남 자체로도 화제 몰이를 했다. 특히 한국영화사에 남을 세기의 대결을 펼쳤다. 신귀식·김지미를 내세운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이 불과 열흘 먼저 개봉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소재를 비슷한 시기에 다루는 건 상도의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영화 시장이 과열되다 보니 벌어진 일이다.
 
그때 신귀식·김지미의 나이는 각각 스물하나 스물둘, 김진규·최은희는 서른아홉, 서른여섯이었다. 젊고 화려한 배우들이 출연한 이몽룡과 성춘향을 더 보고 싶어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우세했지만 결과는 김진규·최은희 콤비의 완승이었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김진규·최은희의 완숙한 연기가 한몫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 출연한 영화는 신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다. 김진규는 사랑방 손님, 나는 젊은 과부의 딸인 옥희의 외삼촌 역으로 나왔다. 이형표 감독의 코미디 ‘서울의 지붕 밑’(1961)에서도 함께했는데 김진규는 서글서글한 산부인과 의사로, 나는 옆집 한약방 아들로 나온다.
 
신상옥 감독의 ‘벙어리 삼룡’.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신상옥 감독의 ‘벙어리 삼룡’.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내가 데뷔할 무렵 김진규는 이미 자기 위치를 탄탄하게 다진 상태였다. 하지만 깜짝 스타로 부상한 나도 선배 배우와 주연 자리를 놓고 경쟁하게 됐다. 1962년 신 감독의 ‘연산군’에서는 내가 주연으로 발탁됐고, 2년 후 신 감독의 ‘벙어리 삼룡’에선 김진규가 주연을 맡는 식이었다. 선의의 경쟁일 뿐이었기에 사적으로는 당연히 가깝게 지냈다. 각자 분주한 일정을 소화하다 보니 같이 놀러 다니거나 특별한 추억을 쌓지 못한 게 아쉽기만 하다.
 
김진규는 재주가 많았다. 또 야심이 컸다. 배우 김진규에 그치지 않고 연출·제작을 겸하는 만능 영화인으로 남고 싶어했다. 그는 내게 자신의 첫 연출작인 ‘종자돈’(1967) 주연 배우로 출연해 달라고 부탁했다.  
 
상대 배우는 그의 아내 김보애였다.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하고 살림이 어려워진 경우를 많이 봤지만 선배 배우의 뜻을 꺾을 순 없었다. “알겠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선배님이 도와 달라는데 제가 해야지요.”
 
이 영화는 바닷가 마을에서 암소 한 마리를 키우면서 종잣돈을 마련하려는 과부와 이웃 마을에서 황소 한 마리를 키우며 사는 홀아비가 우여곡절 끝에 결합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충남 서천군 비인면에서 촬영했다. 나도 김보애도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했지만 아쉽게도 관객 반응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김진규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얼굴에 분칠해 번 돈”을 전부 제작에 쏟아부었다. ‘성웅 이순신’(1971)을 제작하면서 주연까지 도맡았는데 이마저도 흥행에 실패했다. 6년 후 ‘난중일기’(1977)에서 또 한 번 혼신의 연기를 선보였지만 역시 성적은 좋지 않았다.
 
딸 김진아도 부모의 연기 DNA 받아 
 
1960년대 중반 미국 여행 중인 김진규·김보애 부부. [사진 21세기북스]

1960년대 중반 미국 여행 중인 김진규·김보애 부부. [사진 21세기북스]

배우로만 남았다면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을 그인데, 거듭된 투자 실패로 경제난을 겪게 되고 결국 김진규·김보애 부부는 14년여 결혼생활에 마침표를 찍게 됐다. 하지만 마음마저 멀어진 건 아니었기에 두 사람은 말년을 함께 보냈다. 김보애는 남편이 세상을 뜨는 마지막 순간까지 곁을 지켰다.
 
김보애는 ‘한국의 메릴린 먼로’로 불렸다. 서구적 외모로 한국 최초 화장품 모델로 발탁되기도 했다. 그가 남편과 헤어진 뒤 생계를 위해 운영한 민속음식점 ‘못잊어’에 종종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서울 이태원에서 하다 강남으로 옮겼는데 당대 한량들이 다 모인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장사가 잘됐다.
 
하지만 김보애 역시 배우의 꿈을 접지 못하고 나를 보면 “신 회장님, 제가 꼭 북한하고 합작을 한번 할 거예요”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잘 생각했어요. 꼭 추진해 보세요”라며 격려했다. 실제로 그는 2000년 영화기획사를 차리고, 남북 영화교류를 추진했다. 하지만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하고 2017년 암 투병 끝에 별세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딸 김진아도 부모님의 끼를 물려받아 80~90년대 활발한 연기 활동을 했다. 엄마와 함께 ‘수렁에서 건진 내 딸’(1984)에 모녀로 나오기도 했다. 나도 김진아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다. 김진규가 세상을 뜬 후에 진아는 나를 아버지처럼 잘 따랐다. 2000년 미국인과 결혼해 주로 하와이에서 살면서도 종종 안부를 전하곤 했는데 2014년 지병으로 돌연 세상을 떠났다. 나는 서울에서 따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 참석해 애도를 표했다. 이승에서 다 채우지 못한 가족과의 시간, 천국에서나마 함께 보내길 바라면서 말이다.
 
정리=박정호 논설위원,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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