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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길 사람의 길] 추징금 17조원에 담긴 불편한 진실

중앙일보 2020.02.25 00:26 종합 28면 지면보기
문영호 변호사

문영호 변호사

무려 17조원의 미납 추징금을 남기고 떠났다. 도무지 가늠하기 어려운 액수에 추징이란 딱지가 붙은 족쇄에 묶여 있었던 거다. 지난해 말 타계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얘기다. 한 때 ‘세계 경영’의 아이콘이었고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말 한마디로 이 땅의 젊은이들 가슴을 뛰게 하지 않았던가. 복역 중에 징역형에 대해선 사면해 주고도 십수 년이 지나도록 추징의 족쇄는 그대로 두는 법 집행의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법 집행의 실효성 없는데도
엄정한 겉모양만 따지면 위선
이제 추징 규정 다듬어야할 때

일간지에 난 추모의 글을 읽다가 오래전 고인과 맺은 인연의 기억이 떠올랐다. 1995년 11월 대검 중수부 조사실에서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적이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 뇌물수수 사건에서 공여자로 조사하게 된 것이다. 일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조사를 시작하자마자 열변을 토하는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출장길에서 1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급거 귀국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에너지가 넘쳤다. 신문하는 검사를 가르치려 해 말을 끊어야 할 때도 있었다. 뇌물 받은 쪽에서 받은 액수를 이미 털어놓았고 출금을 증빙하는 계좌추적 자료까지 있었기에, 변명은 주로 대가성의 부인에 초점이 맞춰졌다. 정경유착의 불가피성을 역설하며 지목된 몇 개 국책사업의 수주(受注)와 금품제공 사이에 대가관계가 없다는 거였다. 결국 240억원의 뇌물공여로 불구속기소 했고, 그 후 유죄가 선고됐다.
 
되돌릴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 일 처리에서 두고두고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구속 수사 의견을 관철하지 못한 것이다. 뇌물을 건넨 혐의가 있는 30대 재벌 총수들을 모두 소환 조사한 후 실무자로서 내린 결론은, 경제에 미치는 타격을 고려해 기소대상을 최소화하되 정경유착 단절 의지를 단호하게 보여주려면 사안이 무겁고 죄질이 나쁜 두세 명은 구속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금액이 많고 대가성이 뚜렷한 D건설 C회장과 함께 고인도 구속 대상으로 분류됐다. 하지만 불발로 끝났다. 차라리 구속됐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좀 더 일찍 경영의 내실을 다져 IMF 환란 이후 엄청난 규모의 분식회계로 쓰러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IMF 환란 속에서 대마불사(大馬不死)를 기대하던 대우그룹은 1999년 결국 도산했다. 차입(借入)경영의 실상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분식회계로 부풀린 재무제표가 토대가 된 오랫동안의 금융조달이 모두 대출 사기로 몰렸다. 만기가 도래한 대출을 막기 위한 새로운 금융조달까지 누적 집계되면서 대출 사기 금액이 눈덩이처럼 불어났으리라. 거기에 해외사업 운영 목적으로 조성해 굴리던 해외펀드 자금 전액에 재산 국외 도피죄가 적용되는 바람에 17조원에 이르는 추징금 선고로 귀결된 것이다.
 
추징도 엄정한 집행을 요하는 형벌이다. 독자적으로 선고될 수는 없고, 징역형이 선고될 때 덧붙여지는 부가(附加)형이다. 범죄로 인한 이득을 박탈하겠다는 것이다. 사기나 횡령 등의 범죄로 취한 이득이 현금이나 예금 등의 형태로 남아있으면 몰수로 끝낼 수 있지만, 소비돼 남아있지 않으면 그 액수만큼 일반재산에서 빼앗는 게 추징이다. 그러니 몰수와 달리 추징은 애초부터 집행에 어려움이 생길 수밖에 없다. 징역형 집행을 마친 사람에게 숨겨놓은 재산이 있거나 경제활동으로 수익을 얻을 경우 조금씩이나마 집행이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집행 불능에 빠진다. 고액 추징금일수록 집행 불능이 되기 쉽다. 17조원이라면 선고하는 판사조차 집행을 기대하지 않았으리라.
 
집행에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함부로 풀어줄 수 없는 게 법 집행이다. 집행을 책임진 입장에선 ‘집행 불능’ 결정을 어떻게든 미루려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법정 시효 5년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꼼수를 쓰더라도 시효를 연장해 후임자에게 떠넘기는 ‘폭탄 돌리기’ 때문이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고액 추징금 때문에 고초를 겪고 있는 전직 대통령도 있다.
 
엄정함에 치우쳐 구체적 타당성을 잃어도 안 되지만, 법 집행에 실효성이 없어도 법의 권위가 설 수 없다. 고액 추징일수록 집행이 안 되는 현실을 방치해 법 경시 풍조를 부추기지 않으려면, 필요적 추징을 정하고 있는 법 규정들을 다듬어야 하지 않을까. 겉으로는 엄정한 척하면서 속은 공허한, 그런 법 집행의 위선(僞善)에 승복하라고 강요해서야 되겠는가. 세계무대에서 새로운 도전의 고비마다 유연함으로 승부했기에 고인의 족적이 신화가 되지 않았을까. 기업인의 그런 유연함에 족쇄를 채우는 일이 반복된다면, 법이 신뢰를 잃을 것이다.
 
문영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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