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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님들 실적 책임 왜 안 집니까” 블라인드 보면 직장인 속내 보인다

중앙일보 2020.02.25 00:02 경제 4면 지면보기
블라인드

블라인드

“○○기업 임원들은 전원사퇴 한다는데, 임원님들 고개 숙이고 다니세요. 책임 통감은 하십니까?”
 

4만6000개 회사 234만 명 이용
사내갑질 등 알리는 신문고 역할
부서별 성과급 민감 내용도 공유
연애상담·맛집소개 말랑한 글도

이달 초 실적 발표가 끝난 A대기업. 직장인 전용 익명 커뮤니티 애플리케이션(이하 앱)인 블라인드에는 경영 부진을 지적하는 이 기업 직원들의 글들이 올라왔다. 23일 오전 현재 이 글들은 3000건 넘는 조회 수를 기록 중이다. 이 기업 직원(약 2만6000여 명) 중 상당수가 읽은 셈이다. 수십 개의 댓글엔 실적 악화 책임을 직원에게 돌리는 듯한 경영진을 비난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직장인 전용 익명 앱인 ‘블라인드’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2013년 출시 이후 직장인들의 ‘대나무 숲’ 역할을 해왔지만,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경기 악화로 인한 구조조정 우려 등이 커지면서 블라인드 이용도 크게 늘고 있다. 블라인드 측에 따르면 대한민국 4만6000여 개 회사에 재직 중인 234만 직장인들이 이용 중이라고 한다.
  
대한항공 경영권 싸움 놓고 갑론을박
 
대기업 블라인드에 올라온 글들

대기업 블라인드에 올라온 글들

블라인드는 사내 갑질이나 비위를 고발하는 성격이 강했다. 대한항공 조현민 전무의 ‘물벼락 갑질’, 조현아 부사장의 ‘땅콩 회항’,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에 대한 ‘미투’ 폭로, 두산인프라코어의 ‘신입사원 명퇴’ 등 사회적으로 파문을 일으킨 사건 상당수가 블라인드를 통해 알려졌다.
 
“‘쌀집(경기도 이천 소재 SK하이닉스를 의미)’ PS(Profit Sharing·성과이익분배금) 0% 대신 직원들 사기 증진을 위해 격려금 검토한다는데 지급된다면 우리도 가능성 있을까.”
 
최근 삼성전자 블라인드에 올라온 글이다. 최근에는 고발뿐 아니라 정보와 의견교환의 창구로도 활용된다. 삼성전자 등에선 “사업부별 PS 정리 완료” 등의 글이 심심찮게 올라오기도 한다. 사업부별 PS는 비공개가 원칙이다.
 
현안에 대한 사내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에도 블라인드는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최근 사주 일가의 경영권 싸움이 한창인 대한항공의 블라인드에서는 연일 갑론을박이 오간다. 지난 20일에는 “한진칼, 대한항공 1주 모으기 운동을 합시다”란 제목의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게시자는 “혼란을 틈타 은근슬쩍 뺏어가려는 상황이 마치 조선말 외세를 끌어들여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과 다르지 않다”며 안타까워했다.
 
딱딱한 얘기만 오가는 것은 아니다. 최근 한 대기업 계열 정보기술(IT) 회사의 블라인드에는 ‘남자 직원의 제일 꼴 보기 싫은 점 10가지’ ‘여자 직원의 제일 꼴 보기 싫은 점 10가지’란 글이 올라왔다. 글에서는 ‘회사에 와서 손톱을 깎거나’ ‘회사에서 큰 소리로 집안일 관련 전화를 하는 일’ 등이 남자 직원의 꼴 보기 싫은 점들로 ‘하이힐로 지나치게 또각또각 소리를 내고 다니는 것’이 여자직원의 꼴 보기 싫은 점으로 꼽혔다. 연애 상담을 하거나 맛집을 소개하는 글도 올라온다.
 
회사 경영진이나 인사(HR) 관련 부서 관계자로선 블라인드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익명을 원한 5대 그룹 관계자는 “블라인드에선 다소 사실관계가 다른 글이라도 ‘사실’이라는 전제로 확대 재생산되는 경우가 많아 주의 깊게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늘 기업을 비난하는 글들만 올라오는 건 아니다. 최근 구조조정이 임박한 롯데쇼핑 블라인드에선 한 직원이 구조조정 관련 기사 링크를 걸어놓고 “민주노조가 승리했다”는 취지의 글을 올리자 이에 반박하는 댓글이 쏟아졌다. 댓글들에는 “너 뭐하는 인간이냐. 불난 집에 부채질하냐”나 “롯데쇼핑 구조조정으로 문 닫는 게 민주노조 승리하고 무슨 연관이 있냐”는 등의 글이 이어졌다.
  
채용특혜 등 고발, 관행 개선 순작용
 
정광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블라인드를 통해 기업과 그 구성원 간 정보격차가 자연스레 해소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장점”이라며 “블라인드를 통해 ‘사내 갑질’이나 ‘채용 특혜’ 같은 잘못된 기업 관행이 외부로 알려지고 이런 관행이 개선되어 간다는 점만큼은 주목할 만 하다”고 평했다.
 
이런 장점을 극대화하고 블라인드의 부작용은 없애기 위해 스스로 익명 게시판을 만들어 운영하는 기업도 여럿이다. 2018년 8월부터 자체 익명 게시판인 ‘SDS 뉴스’를 운영해 온 삼성SDS가 대표적이다. 철저한 익명성을 보장한 덕에 ‘SDS 뉴스’ 하루 평균 방문자 수는 7500여 명을 헤아린다. 이 회사 직원 수(2019년 3분기 기준)는 1만2518명이다. 일 년 반가량의 운영 기간 중 누적 게시글은 3만2500여 건에 달한다. 해당 부서는 실시간으로 댓글을 단다. 지금까지 회사 측의 공식 답변 수는 약 1000건에 달한다.
 
회사를 상대로 직접 말하기 어려운 요청이 해결된 경우도 있다. 사내 어린이집 입소권 우선순위 대상에 ‘맞벌이 부부’뿐 아니라 ‘싱글대디와 싱글맘’ 등을 넣은 일이 대표적이다. 사옥 엘리베이터 운영 로직을 바꿔 불필요한 대기 시간을 줄인 것도 이 게시판 덕분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익명성만 철저히 보장한다면 회사와 임직원 간 신뢰가 쌓이면서 불필요한 감정 낭비도 줄일 수 있다”고 전했다.
 
이수기·이소아 기자 lee.soo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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