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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딥톡] “구조조정 책임은 왜 직원만 집니까”···‘블라인드’로 살펴 본 직장인 요즘 속내

중앙일보 2020.02.24 05:00
66만6163개. 국내에 있는 기업체 수(2017년 기준)입니다. 국민의 대다수가 회사에서 일하는 직장인인 셈입니다. 매일 출근하고 퇴근하기 전까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직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요. 중앙일보의 새 디지털 시리즈인 [기업 딥톡(Deep Talk)]에선 대한민국 기업의 변화, 그리고 그 속에서 일하는 직장인의 꿈ㆍ희망ㆍ생활을 생생하게 전합니다. 
 

⑦ 직장인 대나무 숲, 블라인드를 말한다

“○○기업 임원들은 전원사퇴 한다는데, 임원님들 고개 숙이고 다니세요. 책임 통감은 하십니까?”
이달 초 실적 발표가 끝난 A 대기업. 직장인 전용 익명 커뮤니티 애플리케이션(이하 앱)인 블라인드에는 경영 부진을 지적하는 이 기업 직원들의 글들이 올라왔다. 23일 오전 현재 이 글들은 3000건 넘는 조회 수를 기록 중이다. 이 기업 직원(약 2만6000여 명) 중 상당수가 글들을 읽은 셈이다. 수십 개의 댓글엔 실적 악화 책임을 직원에게 돌리는 듯한 경영진을 비난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최근 구조조정설이 불거진 한 대기업의 블라인드. 경영책임을 임원들이 져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블라인드 캡쳐]

최근 구조조정설이 불거진 한 대기업의 블라인드. 경영책임을 임원들이 져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블라인드 캡쳐]

직장인 전용 익명 앱인 '블라인드'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2013년 출시 이후 직장인들의 ‘대나무 숲’ 역할을 해왔지만,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과 경기 악화로 인한 구조조정 우려 등이 커지면서 블라인드 이용도 크게 늘고 있다. 블라인드 측에 따르면 대한민국 4만6000여 개 회사에 재직 중인 234만 직장인들이 이용 중이라고 한다.  
 
블라인드는 사내 갑질이나 비위가 회사 밖으로 알려지게 하는 고발의 성격이 강했다. 대한항공 조현민 전무의 ‘물벼락 갑질’, 조현아 부사장의 ‘땅콩 회항’,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에 대한 ‘미투’폭로, 두산인프라코어의 ‘신입사원 명퇴’ 등 사회적으로 파문을 일으킨 사건 상당수가 블라인드를 통해 알려졌다.  
최근 경영 위기를 겪고 있는 아시아나항공 한창수 대표의 장남이 이달 초 운항부문 직원으로 입사한 일이 알려진 것도 블라인드가 신문고 역할을 했다. 그의 둘째 아들은 2017년 이미 일반관리직으로 이 회사에 입사했다. 블라인드엔 "둘째 아들 일반직 취업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카드회사 다니던 첫째 아들까지 운항 인턴으로 급하게 일정 당겨가며 채용시켰다"고 적혔다.  
  

절대 비밀인 부서별 성과급도 공유

삼성전자의 블라인드. 쌀집은 경기도 이천 소재 SK하이닉스를 의미한다. [블라인드 캡쳐]

삼성전자의 블라인드. 쌀집은 경기도 이천 소재 SK하이닉스를 의미한다. [블라인드 캡쳐]

“‘쌀집(경기도 이천 소재 SK하이닉스를 의미)’ PS(Profit Sharingㆍ성과이익분배금) 0% 대신 직원들 사기 증진을 위해 격려금 검토한다는데 지급된다면 우리도 가능성 있을까.”  
 
최근 삼성전자 블라인드에 올라온 글이다. 최근에는 고발뿐 아니라 정보와 의견교환의 창구로도 활용된다. 회사 규모가 큰 삼성전자 등에선 “사업부별 PS 정리 완료” 등의 글이 심심찮게 올라오기도 한다. 알음알음이야 알 수 있겠지만, 사업부별 PS는 비공개가 원칙이다. 하지만 블라인드에서는 이 내용 역시 가감 없이 공개되고, 공유된다. 옆 동네(경쟁 업체)의 성과금도 공개돼 비교 대상이 된다.
 
삼성전자의 사업부별 성과급 지급 기준을 정리한 블라인드 글. [블라인드 캡쳐]

삼성전자의 사업부별 성과급 지급 기준을 정리한 블라인드 글. [블라인드 캡쳐]

한진 상황 구한말에 빗댄 게시글도

한진그룹의 조현아(사진 왼쪽) 전 부사장과 조원태 회장. [중앙포토]

한진그룹의 조현아(사진 왼쪽) 전 부사장과 조원태 회장. [중앙포토]

현안에 대한 사내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에도 블라인드는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최근 사주 일가의 경영권 싸움이 한창인 대한항공의 블라인드에서는 연일 갑론을박이 오간다. 참고로 블라인드 상에선 조원태 현 회장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더 크다. 지난 20일에는 “한진칼, 대한항공 1주 모으기 운동을 합시다”란 제목의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게시자는 “혼란을 틈타 은근슬쩍 뺏어가려는 상황이 마치 조선말 외세를 끌어들여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과 다르지 않다”며 안타까워했다.  
한진그룹 직원의 블라인드 글. [블라인드 캡쳐]

한진그룹 직원의 블라인드 글. [블라인드 캡쳐]

'회사서 손톱깎이' 등 사내 꼴불견 해소에도 일조  

물론 딱딱한 얘기만 오가는 것은 아니다. 연애상담을 하거나, 회사 부근 맛집을 소개하는 글도 다수 올라온다.

 
최근 한 대기업 계열 IT 회사의 블라인드에는 ‘남자 직원의 제일 꼴 보기 싫은 점 10가지’, ‘여자 직원의 제일 꼴 보기 싫은 점 10가지’란 글이 올라왔다. 글에서는 ‘회사에 와서 손톱을 깎거나’, ‘회사에서 큰 소리로 집안일 관련 전화를 하는 일’ 등이 남자 직원의 꼴 보기 싫은 점들로, ‘하이힐로 지나치게 또각또각 소리를 내고 다니는 것’이 여자직원의 꼴 보기 싫은 점으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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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사 관계자는 “그 글 덕분인지, 최근엔 사무실에서 손톱을 깎거나 양치질을 하는 남자 관리자가 눈에 띄게 줄어든 것 같다”며 “마찬가지로 여직원들 역시 조심하는 게 눈에 보인다”라고 전했다.
  
출근 시간 직장인들의 모습. 대부분의 대한민국 직장인들은 차근차근 '승진 계단'을 밟으며 회사 생활을 하게 된다. 한 줄로 서서 이동하지만, 누구나 생각은 다 다르다. [중앙포토]

출근 시간 직장인들의 모습. 대부분의 대한민국 직장인들은 차근차근 '승진 계단'을 밟으며 회사 생활을 하게 된다. 한 줄로 서서 이동하지만, 누구나 생각은 다 다르다. [중앙포토]

침소봉대나, 직원 간 ‘저격 글’ 등은 부담

회사 경영진이나 인사(HR) 관련 부서 관계자로선 블라인드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익명을 원한 5대 그룹 관계자는 “블라인드에선 다소 사실관계가 다른 글이라도 ‘사실’이라는 전제로 확대 재생산되는 경우가 많아 주의 깊게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퇴사한 직원이라도 한번 회사 e메일로 로그인했을 경우 계속 회원으로 글을 올릴 수 있는 점도 부담이다.
 
블라인드를 통해 같은 회사 직원을 공격하는 ‘저격 글’이 올라오기도 한다. 이 경우 누가 글을 쓴 것인지 심증이 있더라도 이를 밝혀내 처벌하는 것은 어렵다. 공연히 ‘블라인드 사찰’ 시비 등이 생길 수 있어서다. 부적절한 사내 연애 등 직원 개개인의 사생활에 대한 글이 올라와도 기업으로선 손을 쓰기 어렵다. 급여나 처우 등을 경쟁사와 직접 비교하는 글들도 뼈아프다. 
 
그래서 재계 10위권의 한 대기업은 블라인드 가입에 필요한 본인 인증용 회신 e메일 계정을 한동안 스팸으로 처리해 블라인드 가입을 저지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블라인드는 직장인 전용 앱인 만큼 가입을 위해선 회사 계정의 e메일을 통한 본인 인증이 필요하다.

 

회사 지지 글도 많아

늘 기업을 비난하는 글들만 올라오는 건 아니다. 최근 구조조정이 임박한 롯데쇼핑 블라인드에선 한 직원이 구조조정 관련 기사 링크를 걸어놓고 “민주노조가 승리했다”는 취지의 글을 올리자 이에 반박하는 댓글이 쏟아졌다. 댓글들에는 “너 뭐하는 인간이냐. 불난 집에 부채질하냐”나 “롯데쇼핑 구조조정으로 문 닫는 게 민주노조 승리하고 무슨 연관이 있냐”는 등의 글이 이어졌다.
주 52시간 근무제 엄수 여부를 묻는 한 대기업 직원의 글. [블라인드 캡쳐]

주 52시간 근무제 엄수 여부를 묻는 한 대기업 직원의 글. [블라인드 캡쳐]

  
정광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블라인드를 통해 기업과 그 구성원 간 정보격차가 자연스레 해소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장점”이라며 “블라인드를 통해 ‘사내 갑질’이나 ‘채용 특혜’ 같은 잘못된 기업 관행이 외부로 알려지고 이런 관행이 개선되어 간다는 점만큼은 주목할 만 하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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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말고 자체 익명 게시판 도입도

이런 장점을 극대화하고 블라인드의 부작용은 없애기 위해 스스로 익명 게시판을 만들어 운영하는 기업도 여럿이다. 2018년 8월부터 자체 익명 게시판인 ‘SDS 뉴스’를 운영해 온 삼성SDS가 대표적이다. 철저한 익명성을 보장한 덕에 ‘SDS 뉴스’ 하루 평균 방문자 수는 7500여 명을 헤아린다. 이 회사 직원 수(2019년 3분기 기준)는 1만2518명이다. 일 년 반가량의 운영 기간 중 누적 게시글은 3만2500여 건에 달한다. 철저한 익명성 덕분인지 다양한 의견이 올라온다. 해당 부서는 실시간으로 댓글을 단다. 지금까지 회사 측의 공식 답변 수는 약 1000건에 달한다.  
 
회사를 상대로 직접 말하기 어려운 요청이 해결된 경우도 있다. 사내 어린이집 입소권 우선순위 대상에 ‘맞벌이 부부’ 뿐 아니라 ‘싱글대디와 싱글맘’ 등을 넣은 일이 대표적이다. 사옥 엘리베이터 운영 로직을 바꿔 불필요한 대기 시간을 줄인 것도 이 게시판에 나온 직원들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익명성 보장과 모바일 기능을 통해 활발한 사내 소통이 이뤄지고 있다”며 “익명성만 철저히 보장한다면 회사와 임직원 간 신뢰가 쌓이면서 그만큼 불필요한 감정 낭비도 줄일 수 있다”고 전했다.  

 
이수기ㆍ이소아 기자 lee.soo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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