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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위협했던 ‘1917’…할아버지 기억 속 진흙탕 참호

중앙일보 2020.02.24 00:03 종합 18면 지면보기
샘 멘데스 감독의 1차 세계대전을 소재로 한 영화 ‘1917’ 한 장면. [사진 스마일이엔티]

샘 멘데스 감독의 1차 세계대전을 소재로 한 영화 ‘1917’ 한 장면. [사진 스마일이엔티]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영국군 청년 스코필드(조지 맥케이)와 블레이크(딘-찰스 채프먼)는 독일군의 함정에 빠진 최전방 부대에 중대한 명령을 전하러 떠난다. 블레이크의 형(리처드 매든)을 포함해 아군 1600명의 목숨이 걸린 지령이다. 주어진 시간은 8시간. 19일 개봉한 샘 멘데스 감독의 영화 ‘1917’ 얘기다. 올해 아카데미상 10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기생충’의 가장 강력한 경쟁작으로 꼽혔고, 촬영상·시각효과상·음향믹싱상 등 3관왕을 차지했다.
 

샘 멘데스 감독 1차 대전 영화
아카데미 촬영상 등 3관왕
119분 안 끊고 한 장면처럼 촬영

영화는 빗발치는 총탄을 뚫고 돌진하는 두 영국 병사의 여정을 상영시간 119분간 끊지 않고 그렸다. 앳된 두 청년 병사에게 밀착한 카메라는 이들이 몸으로 부대낀 전쟁의 참상을 관객도 체험하듯 몰입하게 한다.
 
데뷔작 ‘아메리칸 뷰티’(1999)로 미국 중산층 가정의 허상을 폭로하며 아카데미 작품상 등 5관왕을 받은 그가 ‘1917’에서 보여주려 한 건 스펙터클한 전쟁 액션이 아니다. 당시 참전 병사였던 자신의 할아버지가 일평생 떨쳐내지 못한, 피가 스민 전장의 진흙 기억이다. 영화 말미 헌사한 알프레드 H 멘데스가 그의 할아버지다.
 
어릴 적 멘데스 감독은 “매력적이고 즐겁고 수다스러운 이야기꾼”인 할아버지의 집을 자주 찾았다. 할아버지는 한 번에 몇 분씩, 강박적으로 손을 씻곤 했다. 아버지의 설명은 이랬다. “할아버지는 전쟁 중 손에 묻은 참호의 진흙을 깨끗하게 씻어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통신병으로 서부전선에 배치됐던 할아버지가 열 살 무렵 그에게 전해 준 전쟁 이야기는 섬뜩하고도 눈앞에 그려지듯 생생했다. ‘1917’이 전부 실화는 아니지만, 몇몇 장면은 이처럼 그의 할아버지에게서 탄생했다.
 
사실 할리우드에서 1차 대전은 2차 대전만큼 인기 있는 소재는 아니었다. 2차 대전 영화들이 독일 나치에 맞서 인류애를 지킨 영웅들을 그려 아카데미 작품상을 거머쥔 데 반해 1차 대전은 까다로운 소재였다. ‘1917’을 공동 각본 한 크리스티 윌슨-케인즈는 버라이어티와 인터뷰에서 “1차 대전의 동기는 2차 대전만큼 명확하지 않아서”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멘데스 감독은 뉴욕타임스(NYT)에 “1차 대전은 기관총으로 1000야드(약 914m)에서 사람을 죽일 수 있지만, 20야드 떨어진 군인과 교신은 할 수 없었던, 엄청난 규모의 인재이자 혼돈”이라고 했다. 극 중 매켄지 장군(베네딕트 컴버배치)은 “이 전쟁이 언제 끝날 줄 아느냐”며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The last man standing)”라고 한다. 감독이 그리고자 하는 전쟁의 얼굴이다.
 
이 영화는 ‘원 컨티뉴어스 숏(One continuous shot)’기법으로 촬영됐다. 실제 촬영을 끊지 않고 하는 ‘원테이크’와 다르게 장면을 나눠 찍은 후 편집으로 이어 붙였다. 4개월여 실내 리허설로 카메라 동선을 세세하게 정했다. 멘데스 감독은 “8분짜리 장면을 56번이나 다시 찍었다”고 했다. 카메라가 360도 회전하며 촬영하다 보니 조명 설치 공간이 없어 주로 자연광에 의지했다. 시시각각 바뀌는 그림자를 이어붙이기 어려워 흐린 날을 기다렸다가 찍었다고 한다.
 
영국 출신인 멘데스 감독은 브렉시트 국민투표 후 1년간 “한때 자유롭고 통일된 유럽을 위해 싸운 세대가 있다는 걸 우리가 잘 기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NYT에 전했다.
 
기술과 철학 양면에 우수한 전쟁영화라는 호평 속에 미국 매체 애틀란틱은 “시작 몇 분 만에 이 영화의 특별한 효과는 깨지기 시작한다”면서 “이 인상적인 장거리 경주를 계속하려면 임무가 지속돼야 하기 때문에 진정한 위험은 느껴지지 않는다. 크고 격변하는 세트 속에서 우리의 주인공들은 체스판 위의 말처럼 보인다”고 했다. 15세 관람가.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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