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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위협했던 美영화 '1917', 할아버지 참전경험 손자 영화로

중앙일보 2020.02.21 11:00
샘 멘데스 감독의 1차 세계대전 영화 '1917' 한 장면.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의 최대 적수로 점쳐졌다. [사진 스마일이엔티]

샘 멘데스 감독의 1차 세계대전 영화 '1917' 한 장면.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의 최대 적수로 점쳐졌다. [사진 스마일이엔티]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영국군 청년 스코필드(조지 맥케이)와 블레이크(딘-찰스 채프먼)는 독일군의 함정에 빠진 최전방 부대에 중대한 명령을 전하러 떠난다. 블레이크의 형(리차드 매든)을 포함해 아군 1600명의 목숨이 걸린 지령이다. 주어진 시간은 8시간뿐. 19일 개봉한 샘 멘데스 감독의 할리우드 영화 ‘1917’ 얘기다.

'기생충' 아카데미 최대 경쟁작
英감독 샘 멘데스 1차 대전 영화
감독 할아버지 참전 경험 토대
119분 안 끊고 한 장면처럼 촬영

 

전쟁, 119분간 한 장면처럼 담았다

영화는 빗발치는 총탄을 뚫고 돌진하는 두 영국 병사의 절체절명 여정을 상영시간 119분간 단 한 번도 끊지 않고 그렸다. 영화 전체를 한 장면처럼 보이게 만든 촬영‧편집술이 빼어난 덕이다. 아직 앳된 두 청년 병사에게 밀착한 카메라는 이들이 몸으로 부대낀 전쟁의 참상을 관객도 체험하듯 몰입하게 한다.  
샘 멘데스 감독의 1차 세계대전 영화 '1917' 한 장면.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의 최대 적수로 점쳐졌다. [사진 스마일이엔티]

샘 멘데스 감독의 1차 세계대전 영화 '1917' 한 장면.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의 최대 적수로 점쳐졌다. [사진 스마일이엔티]

  
이 영화는 올해 아카데미상에 10개 부문 후보에 호명되며, ‘기생충’의 가장 강력한 경쟁작으로 꼽혔다. 전쟁영화를 선호하는 아카데미 취향까지 고려하면 ‘기생충’보다 선전하리란 예측도 많았다. 결국 작품상‧감독상은 ‘기생충’에 고배를 마셨지만, 촬영상‧시각효과상‧음향믹싱상 3관왕을 차지했다.  
 

전쟁 스펙터클보다 중요했던 것 

'1917' 촬영 현장에서 샘 멘데스 감독(가운데)이 영국군 통신병 역의 주연배우 딘-찰스 채프먼, 조지 맥케이(왼쪽부터)와 동선을 상의하고 있다. [사진 스마일이엔티]

'1917' 촬영 현장에서 샘 멘데스 감독(가운데)이 영국군 통신병 역의 주연배우 딘-찰스 채프먼, 조지 맥케이(왼쪽부터)와 동선을 상의하고 있다. [사진 스마일이엔티]

멘데스 감독에겐 첫 전쟁영화다. 영국 출신으로 명문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와 연극 연출로 출발한 그는 할리우드에서 찍은 영화 데뷔작 ‘아메리칸 뷰티’(2000)로 미국 중산층 가정의 허상을 폭로하며 아카데미 작품상 등 5관왕을 수상, 단숨에 거장 반열에 올랐다. 007 영화로 두 번째 연출을 맡은 액션영화 ‘스카이폴’(2012)은 역대 시리즈 최고 흥행작에 등극했다.
 
그러나 ‘1917’에서 그의 관심사는 스펙터클한 전쟁 액션 아닌 다른 데 있었다. 당시 참전 병사였던 자신의 할아버지가 일평생 떨쳐내지 못했던, 피가 스민 전장의 진흙의 기억 말이다. 영화 말미 헌사를 바친 알프레드 H 멘데스가 바로 그의 할아버지다.  
 

할아버지가 씻지 못한 전쟁의 기억 

영화 '1917'에서 두 주인공이 독일군이 파괴하고 빠져나간 폐허를 지나가고 있다. 영화 첫 장면 이들이 짧은 낮잠에 빠졌던 한가로운 들판 풍경과 임무를 맡은 후 맞닥뜨리는 전쟁의 광경이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사진 스마일이엔티]

영화 '1917'에서 두 주인공이 독일군이 파괴하고 빠져나간 폐허를 지나가고 있다. 영화 첫 장면 이들이 짧은 낮잠에 빠졌던 한가로운 들판 풍경과 임무를 맡은 후 맞닥뜨리는 전쟁의 광경이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사진 스마일이엔티]

어릴 적 멘데스 감독은 영국령 서인도제도의 할아버지댁에 자주 놀러갔다. 런던 토박이 손자에게 할아버지는 별난 모험가였다. “이 매력적이고 즐겁고 수다스러운 이야기꾼”이 불과 열아홉 살에 참전해 끔찍한 일들을 겪었을 줄 그는 꿈에도 몰랐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 “왜 할이버지가 손을 그렇게 많이 씻지?”라고 묻기 전까지는 말이다.  
 
할아버지는 한 번에 몇 분씩, 강박적으로 손을 씻곤 했다. 사촌들과 함께 그런 할아버지를 놀리곤 했던 어린 멘데스 감독에게 아버지의 대답은 충격이었다. “할아버지는 전쟁 중 손에 묻은 참호의 진흙을 기억하고 절대로 그걸 깨끗하게 씻어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머리 없는 독일군이 계속 달리던 참상

그렇게 열 살 무렵부터 그가 할아버지에게 들은 전쟁 이야기는 섬뜩하고도 눈앞에 그려지듯 생생했다. 1차 대전 당시 적진을 뚫고 참호까지 부축해온 부상병이 자기 대신 총을 맞아 이미 숨져 있었다거나, 폭발로 머리가 떨어져 나간 독일 병사가 몸은 계속 도망치고 있었다는 등의 일화들. 그가 뉴욕타임스(NYT)에 전한 얘기다.  
 
또 체구가 작고 빨랐던 할아버지는 1917년 통신병으로 선발돼 서부전선에 나섰다. 바로 전 전투에서 그의 대대 3분의 1가량이 죽어 나간 직후, 적진에 에워싸인 아군 생존자들을 복귀시키는 지령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영화사와 사전 인터뷰에 따르면, ‘1917’이 전부 실화는 아니지만, 몇몇 장면은 이처럼 그의 할아버지에게서 탄생했다.
  
이후 멘데스 감독은 자료 조사를 통해 1917년 독일군이 힌덴부르크 전선까지 퇴각한 이후 독일군의 동향을 정확히 읽어내지 못한 영국군이 독일군이 빠져나간 폐허에서 망설이던 시기를 찾아냈다. 이를 토대로 영화의 틀을 만들었다. 여기에 공동 각본가 크리스티 윌슨-케인즈가 두 청년 병사의 사연을 빚어냈다.
 

할리우드서 2차대전만큼 주목 안된 이유

1차 세계대전 영화 '1917'에서 붕괴된 다리를 건너는 이 장면은 강 양쪽에 와이어 시스템을 구축해 카메라를 매달아 촬영했다. [사진 스마일이엔티]

1차 세계대전 영화 '1917'에서 붕괴된 다리를 건너는 이 장면은 강 양쪽에 와이어 시스템을 구축해 카메라를 매달아 촬영했다. [사진 스마일이엔티]

사실 할리우드에서 1차 대전은 2차 대전만큼 인기 있는 소재는 아니었다. ‘미니버 부인’ ‘카사블랑카’ ‘지상에서 영원으로’ ‘콰이강의 다리’ ‘패튼 대전차 군단’ ‘쉰들러리스트’ ‘잉글리시 페이션트’ 등 2차 대전 영화들이 독일 나치에 맞서 인류애를 지킨 영웅들을 그려 아카데미 작품상을 거머쥔 데 반해 1차 대전은 까다로운 소재였다. 
 
각본가 윌슨-케인즈는 할리우드 매체 버라이어티와 인터뷰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1차 대전의 동기는 2차 대전만큼 명확하지 않다”면서“부분적으론 제국주의 열강들이 부당 이익을 취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그 무렵 해외 식민지들을 잃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몇㎝의 좁은 땅 차지하려 청년들 희생

'1917'에서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연기한 맥켄지 장군은 "최후의 1인이 남아야 전쟁이 끝날 것"이라며 전쟁의 잔혹하고 어리석은 속성을 말한다. [사진 스마일이엔티]

'1917'에서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연기한 맥켄지 장군은 "최후의 1인이 남아야 전쟁이 끝날 것"이라며 전쟁의 잔혹하고 어리석은 속성을 말한다. [사진 스마일이엔티]

1차 대전은 전투비행기, 신경가스 같은 대량파괴 무기를 투입해 1600만 군인을 전사시킨 최초의 현대전이기도 했다. 멘데스 감독은 NYT에 이렇게 표현했다. “기관총으로 1000야드(약 914m)에서 사람을 죽일 수 있지만, 20야드 떨어진 군인과 교신은 할 수 없었던, 엄청난 규모의 인재이자 혼돈이었다”고 말이다.  
 
불과 몇㎝의 좁은 땅이라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멘데스 감독은 인간이 탄생시킨 전쟁이란 비극의 본질을 파고들길 택했다. 극 중 맥켄지 장군(베네딕트 컴버배치)이 “이 전쟁이 언제 끝날 줄 아느냐”며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The last man standing)”라고 말한 대사가 한 예다. 1차 대전 영화 ‘워 호스’에서 한 소년과 전쟁에 징집된 애마의 우정을 그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자신의 영화사 앰블린파트너스를 통해 제작에 참여했다.   
 

103년 전 전투 실시간 중계하듯 생생 

영화 '1917' 촬영 비하인드 스틸. [사진 스마일이엔티]

영화 '1917' 촬영 비하인드 스틸. [사진 스마일이엔티]

영화 '1917' 촬영 뒷모습. [사진 스마일이엔티]

영화 '1917' 촬영 뒷모습. [사진 스마일이엔티]

영화 '1917' 촬영 비하인드 스틸. [사진 스마일이엔티]

영화 '1917' 촬영 비하인드 스틸. [사진 스마일이엔티]

‘원 컨티뉴어스 숏(One continuous shot)'. 이번 영화에 쓰인 기법이다. 실제 촬영을 끊지 않고 하는 ’원테이크‘와 다르게 장면을 나눠 찍은 후 편집으로 이어 붙였다.  
 
멘데스 감독은 ’007 스펙터‘의 오프닝 장면에서 이런 기법을 시도한 적 있지만 2시간에 육박하는 영화는 다른 차원의 도전이었다. 이를 위해 ‘블레이드 러너 2019’에 이어 이번 영화로 두 번째 아카데미 촬영상을 받은 로저 디킨스 촬영감독, 전쟁영화 ‘덩케르크’로 아카데미 편집상을 받은 리 스미스 편집감독이 합류했다. 
영화 '1917' 촬영 비하인드 스틸. [사진 스마일이엔티]

영화 '1917' 촬영 비하인드 스틸. [사진 스마일이엔티]

 

8분짜리 장면, 56번 다시 찍었다 

사전에 계획된 각 장면의 길이와 배우의 동선, 세트장의 길이가 일치해야 했다. 4개월여 실내 리허설로 카메라 동선을 세세하게 정했다. LA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멘데스 감독은 “5분 이하 장면이 거의 없었고 한 번에 10분간 찍은 장면도 있다”면서 “어떤 8분짜리 장면을 56번이나 다시 찍으며 ’내가 왜 이 짓을 작정했나‘ 하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카메라가 거의 360도 회전하며 촬영하다 보니 조명을 설치할 공간이 없어 주로 자연광에 의지했다. 햇살에 시시각각 바뀌는 그림자를 이어붙이기 어려워 흐린 날을 기다렸다가 찍었다. 붕괴돼 침수된 다리를 가로지르는 장면은 강 건너편까지 와이어 시스템을 구축해 찍었다. 편집은 캐릭터들이 참호에 들어갈 때나 몸의 윤곽, 소품 등이 클로즈업되는 순간을 찾아 섬세하게 연결했다.  
 
영화 '1917' 촬영 비하인드 스틸. [사진 스마일이엔티]

영화 '1917' 촬영 비하인드 스틸. [사진 스마일이엔티]

이런 노력 끝에 영화 전체가 실시간 임무 상황의 생중계처럼 완성됐다. 비교적 낯선 얼굴의 배우들을 주연에 발탁한 것도 사실감을 위해서다. 조지 맥케이는 2013년 영국 영화 ‘포 도즈 인 페릴’로 스톡홀름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딘-찰스 채프먼은 영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으로 얼굴을 알렸다. 여정의 매 단계 짧고 굵게 방점을 찍는 단역엔 콜린 퍼스, 베네딕트 컴버배치 등 영국 연기파 스타들이 총출동했다.  
 

영국 브렉시트 사태에 영감 

영화 '1917'에 나오는 1차 대전 당시 유럽 대륙의 목가적인 풍광을,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브렉시트와 연관성으로 해석했다. [사진 스마일이엔티]

영화 '1917'에 나오는 1차 대전 당시 유럽 대륙의 목가적인 풍광을,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브렉시트와 연관성으로 해석했다. [사진 스마일이엔티]

1차 대전 이야기가 “할아버지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라고 느껴왔다”는 멘데스 감독이 결국 영화화에 나선 건 ‘007 스카이폴’ 이후 작품을 쉬던 무렵 닥쳐온 브렉시트 사태도 계기가 됐다.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하려 나선 2016년 프랑스에선 1차 대전 최악의 참극으로 불리는 ‘솜전투’ 발발 100주년 추모식이 열렸다. 독일군에 맞서 프랑스와 연합했던 영국의 총리와 왕실도 참석했다. 
 
멘데스 감독은 브렉시트 국민투표 후 1년간 “한때 자유롭고 통일된 유럽을 위해 싸운 세대가 있다는 걸 우리가 잘 기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NYT에 전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이 영화는 푸르고 쾌적한 (유럽대륙)땅에 대한 향수로 끝난다”면서 브렉시트와의 연관성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주연 배우 조지 맥케이(가운데)는 액션 장면도 대부분 대역 없이 직접 연기했다. [사진 스마일이엔티]

주연 배우 조지 맥케이(가운데)는 액션 장면도 대부분 대역 없이 직접 연기했다. [사진 스마일이엔티]

 
기술과 철학 양면에 우수한 전쟁영화라는 호평이 우세하지만 이런 비판도 있다. 미국 매체 애틀란틱은 “멘데스와 디킨스의 시각적 성과는 부인할 수 없지만, 시작 몇 분 만에 이 영화의 특별한 효과는 깨지기 시작한다”면서 “이 인상적인 장거리 경주를 계속하려면 임무가 지속돼야 하기 때문에 진정한 위험은 느껴지지 않는다. 크고 격변하는 세트 속에서 우리의 주인공들은 체스판 위의 말처럼 보인다”고 했다. 비평 사이트 메타스코어에서 세계 57개 매체는 이 영화에 100점 만점에 평점 78점을 매겼다. 15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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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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