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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응답하라, 김명수

중앙일보 2020.02.20 00:17 종합 28면 지면보기
이가영 사회1팀장

이가영 사회1팀장

무죄, 무죄, 무죄, 무죄. 지난 13, 14일 잇따라 열린 법관 4명에 대한 재판 결과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과 관련해 기소된 현직 법관에 대한 사법부의 첫 판단이었다. 공무상기밀누설과 직권남용 등의 혐의가 적용된 신광렬·조의연·성창호·임성근 판사는 모두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검찰이 항소 의지를 밝히면서 이들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피고인으로 법정에 서야 한다. 다만 1심 결과로 약간의 명예를 되찾았고, 이어진 대법원의 조치로 업무에 복귀하게 됐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건은 법원 전체에 돌이킬 수 없는 오점을 남긴 역사다. 직전 대법원장이 구속되는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전직 대법관 등 전·현직 고위 법관 10여명이 기소됐고, 이른바 ‘엘리트’ 법관들이 참고인이나 피의자로 줄줄이 검찰에 불려갔다. 그 영향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최초로 제기하고, 공론화하고, 스스로를 피해자라 칭했던 이들이 법복을 벗고 잇따라 정치권으로 뛰어들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의 이편이든 저편이든, 법원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이 그 어느 때보다 싸늘해진 것을 부인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노트북을 열며 2/20

노트북을 열며 2/20

1심 법원의 이어진 무죄 판단을 두고 법조계에선 검찰의 기소가 무리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법원이 ‘제식구 감싸기’를 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법원의 최종 판단 뿐 아니라 관련 인사들의 다른 재판도 남아 있는 만큼 현재로선 무엇이 옳다고 말하는 게 성급해 보인다. 그럼에도 무죄로 이어진 법관들의 무더기 기소사태를 책임져야 할 대법원(장)에 대해선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다.
 
법원은 검찰 조사 이전 세 차례 진상조사를 벌였다. 세 번의 조사 모두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했고, 관련자들을 고소·고발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법원내 적폐’를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들끓자 김명수 대법원장은 2018년 6월  “고소·고발은 할 수 없지만 검찰의 수사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사법부의 수장이 스스로 내놓은 조사 결과를 믿지 못하고 사실상 법관들을 수사의뢰한 셈이다. 하지만 최근의 재판 결과는 당시 김 대법원장의 비장한 각오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관련 재판들이 상고심까지 진행된다면 김 대법원장도 한 명의 재판관으로 참가하게 된다. 그래서 재판 결과에 입장을 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스스로 신뢰를 무너뜨린 사법부를 지켜보며 심한 고통을 겪었을 법관들을 향해선 최소한의 책임있는 메시지를 던져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은 대법원장이 침묵할 때가 아니라, 응답할 때다.
 
이가영 사회1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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