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 인생 51살에 끝나" 가습기살균제 피해자11% 극단선택 시도

중앙일보 2020.02.18 17:13
휴대용산소 발생기를 착용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서영철(62)씨가 18일 오전 서울 중구 포스트타워에서 열린 사회적참사특조위의 가습기살균제 전체 피해가정 대상 첫 조사결과 발표에서 피해상황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뉴스1]

휴대용산소 발생기를 착용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서영철(62)씨가 18일 오전 서울 중구 포스트타워에서 열린 사회적참사특조위의 가습기살균제 전체 피해가정 대상 첫 조사결과 발표에서 피해상황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뉴스1]

# 경남 창녕에 사는 서영철(62)씨는 한때 골프를 좋아하고 사회인 야구단에서 활동하는 등 건강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2009년 가습기살균제 광고를 본 순간부터 비극이 시작됐다. 건강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정부가 인증한 가습기살균제를 쓰기 시작했다. 2011년 의료 기관에서 천식 질환 판정을 받았을 때 서씨의 폐 기능은 20%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다. 휴대용 산소통을 등에 메고 콧줄을 연결해 호흡하기 시작했다. 유해한 화학제품을 만든 업체도, 이를 허가한 정부도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그가 피해를 공식 인정받은 건 발병 후 8년이 지난 2019년이었다. 그는 "제 인생은 51세에 끝났다"며 "한번은 극단적 선택을 하려 약 60여알을 털어먹었는데 3일 만에 깨어났다. 우리 가족은 지금도 내가 유서를 남겨놓은 사실을 안다"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서씨를 만난 건 18일 오후 서울시 중구 포스트타워에서 열린 '가습기살균제 전체 피해 가정 대상 첫 조사결과' 자리에서다. 이날 가습기살균제사건과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는 한국역학회와의 공동조사를 통해 가습기살균제 피해 가구를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는 전체 4953가구 중 조사에 동의한 1152가구와 전체 피해자 6590명 중 조사에 동의한 873명을 대상으로 지난해 6월부터 12월까지 이뤄졌다.
 

성인 피해자 80% 만성적 울분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18일 오전 서울 중구 포스트타워에서 열린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가습기살균제 전체 피해가정 대상 첫 조사결과 발표'에 참석해 자리에 앉아 있다.[뉴스1]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18일 오전 서울 중구 포스트타워에서 열린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가습기살균제 전체 피해가정 대상 첫 조사결과 발표'에 참석해 자리에 앉아 있다.[뉴스1]

조사 결과 성인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의 절반은 극단적 선택을 생각할 정도로 큰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었다. 성인 피해자 중 78.9%는 만성적 울분(지속되는 울분+극심한) 울분을 겪고 있었다. 이는 동일 척도를 적용한 국내외 어느 문헌에서도 보고된 바 없는 수준의 심각한 수치라고 조사단은 설명했다. 그 밖에도 ▶우울·의욕저하·불안·긴장 72% ▶집중력·기억력 저하 71.2% ▶불면 66%, 분노 64.5% ▶죄책감 62.6% ▶극단 선택 생각 49.4%로 나타났다. 이들 중 서씨처럼 실제 극단 선택을 시도한 이들은 11%다. 아동·청소년 피해자의 4.4%도 극단 선택을 시도했다. 아동·청소년 피해자의 44.4%는 집중력·기억 저하를 겪고 성인과 마찬가지로 불안·긴장(42.5%), 분노(36.2%), 극단 선택 생각(15.9%)을 겪고 있었다.
 

"정부 기관에 피해 호소하면 '더 공부하고 오세요' 대답"

이들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건 피해를 인정받지 못하거나 인정을 받기까지 너무 어려운 과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조사단은 밝혔다. 피해자들은 현재 정부에서 피해 질환으로 인정하는 질환뿐 아니라 성인의 경우 폐 질환 83%, 코 질환 71%, 피부 질환 56.6%, 안과 질환 47.1%, 위염과 위궤양 46.7%, 심혈관계 질환 42.2%를 호소했다. 피해자 박혜정(54)씨는 "피해자들이 원하는 건 무엇보다 자신의 피해를 인정받는 것"이라며 "판정 기준이 잘못돼 11년째 피해 인정조차 못 받는 피해자가 수두룩하다"고 호소했다. 피해를 인정받기 위해 환경부를 비롯, 관계 기관에 연락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전문가가 아니라고 한다""법이 그렇다""배워서 공부하고 오라"였다. 박씨는 "피해를 인정조차 못 받으면 울분이 쌓일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조사에 참여한 김동현 한림의대 사회의학 교수는 "피해자들이 건강을 되찾고 적절한 보상을 받는 게 이렇게 어렵다는 것에 놀랐다"고 말했다.
황전원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 지원소위원회 위원장이 18일 오전 서울 중구 포스트타워에서 열린 가습기살균제 전체 피해가정 대상 첫 조사결과 발표에서 발언하고 있다.[뉴스1]

황전원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 지원소위원회 위원장이 18일 오전 서울 중구 포스트타워에서 열린 가습기살균제 전체 피해가정 대상 첫 조사결과 발표에서 발언하고 있다.[뉴스1]

 
황전원 특조위 지원소위원장은 "정부 인정 범위가 협소하다 보니 피해자끼리 갈등이 생기기도 하는데 잘못된 피해제도가 빚어낸 아픔"이라며 "국회 법사위에 계류 중인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법의 20대 국회 내 처리가 절실하다"고 밝혔다. 특조위는 이번 조사를 통해 가습기살균제 피해를 '가습기살균제증후군'으로 정의하고 통합치료지원센터를 구축해 전 생애적 피해에 대응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정은혜 기자 jeong.eunhye1@joongang.co.kr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