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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훈 칼럼] ‘대한민국의 길’ 새로이 깔아야 할 4·15 총선

중앙일보 2020.02.18 00:36 종합 31면 지면보기
최훈 제작총괄 겸 논설주간

최훈 제작총괄 겸 논설주간

심판은 세 가지다. 신(神)의 심판, 법원의 그것, 그리고 평범한 인간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선거다. 신의 심판이야 그 경지를 가늠키 어렵고, 법원은 갈수록 정치 권력에 오염돼 믿음을 잃고 있다. 끄떡없던 권력이 ‘민주당만 빼고’ 찍자는 한 교수의 칼럼에 노발대발한 걸 보니 역시 저잣거리 사람들의 심판이 가장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다.
 

‘평등’‘자유’ 간 역사의 갈등 반복
자유·평등은 원래 불가분의 조화
급진적인 ‘결과의 평등’ 물리치고
‘선택할 자유’ 되살릴 결단의 시점

‘민주당 찍자, 말자’를 넘어 4·15 총선은 더욱 커다란 그 무엇을 선택해 나라의 초석을 새로 깔아야 할 ‘정초(定礎)선거’가 틀림없다. 지난 72년간 대한민국은 두 줄기 격랑의 소용돌이에 늘 휩싸여 왔다. 식민 해방 뒤 어떤 새 국가를 만들 것인지 선택할 시점부터였다. 하나는 봉건 왕조와 일제 억압 뒤의 ‘자유’라는 거대한 물결이요, 다른 하나는 반상(班常)·양천(良賤) 계급의 빈부·차별에 맞선 ‘평등’이라는 파고였다.
 
소련을 좇아 ‘평등’에 방점을 찍은 북쪽의 국가 모델을,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이식된 ‘자유’의 국가 모델이 전쟁까지 치르며 가까스로 막아낸 건 행운이었다. 잉태된 혼돈은 계속됐다. 북한이 독재와 빈곤·무기력의 ‘평등’으로 몰락한 사이 ‘자유’를 내세운 남쪽 역시 권력의 억압과 자본주의, 부의 불평등 논쟁으로 바람 잘 날 없었다.
 
인간의 두 본질적 가치인 ‘평등’과 ‘자유’는 원래 이란성 쌍둥이다. 불가분이었다. 미국 독립선언문을 보자.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됐고,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다. 그 권리 중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평등하게 창조됐기에 인간은 타인의 침해 없이 스스로 자기 삶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역으로 자유가 보장돼야 인간은 창조주 앞에서 평등해질 수 있다! 둘 사이의 모순은 없다. 제로섬? 둘의 조화가 신의 섭리다.
 
이 조화를 부정하며 제로섬의 택일을 요구하고 나선 게 바로 급진주의자들이다. ‘평등 최우선’의 86운동권 출신 진보 권력이 가져온 우리 사회의 극심한 혼돈은 정확히 이 지점에서 벌어진 현상이다. 평등이란 좀 더 정확히는 ‘기회의 평등’이다. 금수저·흙수저니 현빈의 얼굴과 넓은 어깨, 수능 만점의 타고난 IQ 등 출발선이야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노력과 열정으로 자기 삶을 더 행복하게 만들 기회가 함께 주어진다면 그게 평등이다. 누구는 기회를 잡고, 누구는 놓칠 터다.
 
급진주의자들은 그러나 “악마는 가장 뒤처진 사람만을 잡아먹는다”며 먼저 가진 자들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긴다. “모두가 결승선에 나란히 들어오는 게 정의”라고 피리를 불어댄다. ‘결과의 평등’이다. 공동체는 무너진다. 그런 세상은 거짓이다. 소련·북한이란 이상향? 모두 대참사로 끝났다. 민주주의, 사적소유권과 시장경제를 택한 공동체의 합리적 기대치를 가장 공감 가게 묘사한 이는 보수주의 사상가인 러셀 커크다. “참을 만하게 질서가 잡혀 있으며, 정의롭고 자유로운 사회로서 어느 정도의 악과 사회적 불평등, 고통은 그럼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곳.”(『보수의 정신』)
 
우리 사는 세상은 숱한 문제를 노출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터다. 하지만 또 모두 거부하기만은 힘든 ‘지혜의 뭉치’를 일러줘 왔다. 우리가 보듬어 온 자유, 시장경제, 기회의 평등은 오랜 삶과 역사적 경험의 산물이다. 적잖은 피와 땀이 밴 고통, 희생과 참회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무질서와 증오’의 낯선 악마보다는 ‘보이지 않는 손’이란 친숙한 악마를 더 가까이 해 온 게 인간의 지혜였다.
 
지난 3년여. 정권은 그러나 뭔가에 홀린 듯 급진주의적 정책들을 강요하며 이 널리 배어있는 대한민국의 지혜를 무너뜨려 왔다. 특목·자사고 폐지, 강남 아파트 때려잡기, 후세의 재산을 당겨서 탕진할 과도한 복지·연금,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과 이른바 소득주도 성장, 정규직 확대 등…. 이 과정에서 자신의 책임을 전제로 한 인간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인 ‘선택할 자유(free to choose)’ 는 망가질 소지가 커졌거나 실제 망가져 왔다.  
 
커크의 지적대로 인간과 사회는 결코 기계가 아니다. 핏줄과 마음을 지닌 유기적 생명체다. 권력이 마음대로 인간과 사회를 고칠 수 있다고 믿는 자체가 급진주의·전체주의적이다. 개인이 선택할 자유를 정부가 박탈한다면 그 사회의 숨결은 결코 유지될 수 없다. 미국 독립운동 사상가였던 로아노크의 하원의원 존 랜돌프의 비유대로 “신의 섭리는 늘 천천히 움직이지만 악마는 언제나 서두를 뿐”이다. 급진주의자들은 그들이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그리고 험악하게 사회를 망가뜨리는 이들이다.
 
‘BTS’ ‘기생충’을 만든 창의의 나라, 21세기 세계 12위 경제 공동체에 ‘결과적 평등’이란 급진적 몽상(夢想)이 끼어들 공간은 없다. “평등만이 정의”라고 호도하지 말라. 사람, 기업, 공동체의 ‘선택할 자유’를 되살려야 한다.  
 
혼돈의 한가운데, 이제 주인이 나라의 길을 다시 명령해야 할 때다. ‘선택할 자유’와 ‘기회의 평등’이 조화로운 사회냐, 오로지 ‘결과의 평등’이냐…. 당과 후보들은 명확히 천명하라! 그러곤 혹독한 사람들의 심판대로 올라오라.
 
최훈 제작총괄 겸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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