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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으로 읽는 책 (44)

중앙일보 2020.02.17 00:07 종합 31면 지면보기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말을 섞는 것은 살을 섞는 것보다 관능적인 행위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이다. 나는 섹스보다 대화가 더 심각한 인간관계라고 생각한다. 말이 통한 다음에 올 천국과 파국을 알기에, 되도록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 엮이는 것만큼 재앙도 없다. 말은 물질이다. 말 한마디는 빚만 갚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게 한다.
 
정희진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페미니즘 관점을 녹인 예리한 글쓰기로 정평 난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 2탄이다. 1탄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와 함께 나왔다. 책의 외양은 그가 읽은 여러 책에 대한 짧은 평문 형식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말과 글, 우리의 언어에 깃든 가부장적, 차별적 권력관계를 묘파해내기도 한다,
 
정희진은 스스로 글쓰기의 동력을 ‘상처’에서 찾는다. 아마도 가부장적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 중점 소수자들의 상처일 것이다. “상처가 없으면 쓸 일도 없다. 작가는(학자도 마찬가지다) 죽을 때까지 ‘팔아먹을 수 있는’ 덮어도 덮어도 솟아오르는 상처가 있어야 한다. 자기 얘기를 쓴다는 것은 경험을 쓰는 것이 아니다. 경험에 대한 해석, 생각과 고통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 자체로 쉽지 않은 일이고, 그것을 표현한다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산을 넘는 일이다.” 페미니스트에게 글쓰기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가 내놓은 답이다. 굳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더라도 왜, 무엇을 쓰는가에 대한 훌륭한 답이다.
 
양성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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