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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자객 박인비, 도쿄에 갈 채비...23개월 만에 우승

중앙일보 2020.02.16 16:57
박인비. [epa=연합뉴스]

박인비. [epa=연합뉴스]

아주 먼 거리 퍼트를 넣고 큰 박수를 받을 때도 별로 기쁜 기색 없이 팬들에게 슬쩍 손만 들어 보인다고 해서 ‘침묵의 암살자’라는 별명을 가진 박인비(32)가 오랜만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박인비는 16일 호주 로열 에들레이드 골프장에서 끝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ISPS 한다 호주여자오픈에서 우승했다. 최종라운드 1오버파 74타, 합계 15언더파로 에이미 올슨(미국)을 3타 차로 꺾었다. 박인비의 LPGA 통산 20승째다. 한국 선수 중 박세리(25승)에 이어 두 번째로 20승 고지에 올랐다.
   
한국의 신예 조아연(20)에 3타 차 선두로 경기를 시작한 박인비는 첫 홀 보기를 했지만 3, 4번 홀 버디로 도망갔다. 한때 6타 차 선두를 달렸고 잠시 위기도 맞았다. 16번 홀 보기로 타수 차가 2로 줄었을 때다. 
 
그러나 박인비는 다음 홀에서 버디를 잡아 깨끗하게 승부에 마침표를 찍었다. 박인비는 경기 후 평소보다 매우 기뻐했다. 그의 동기인 신지애, 최나연, 이정은(5)과 유소연, 이미향, 이정은6 등이 박인비에게 샴페인을 퍼부었다.
 
이유가 있다. 박인비는 2018년 3월 19일 끝난 파운더스컵에서 19언더파로 LPGA 통산 19승째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후 지독한 아홉수를 겪었다. 2위가 5번이었다. 2018년 ANA 인스퍼레이션에서 연장 끝에 패했고, 휴젤 LA오픈에서도 2위에 머물렀다. 
 
지난해엔 기아클래식에서 최종라운드 선두로 출발해 역전패했고, 월마트 챔피언십에서도 준우승에 그쳤다. 올 시즌 개막전인 다이아몬드 리조트 토너먼트 오브챔피언스에서도 1위로 마지막 라운드를 시작했으나 우승컵을 지키지 못했다.
 
침묵의 암살자라는 별명은 표정이 없다는 뜻도 있지만, 유능한 자객처럼 아무도 모르게 확실히 마무리한다는 의미도 있다. 박인비가 19승을 한 후 그 자객의 능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도 나왔다. 그런 박인비가 23개월의 공백을 깨고 우승했다. 19승은 19일 19언더파로 우승했는데, 20승은 2020년 이룬 우승이다.  
 
박인비는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후 성적이 좋지 않았다. 손목과 허리 부상으로 고생했다. 또한 골든 커리어 그랜드슬램(올림픽 금메달과 4개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을 달성한 후 딱히 더 이룰 것이 없었다. 2018년에는 몸이 아프지 않은데도 대회 참가수를 확 줄였다. 은퇴를 준비했다.
  
그러나 올해 다시 올림픽 출전을 위해 출사표를 던졌다. 세계 정상급 선수가 많은 한국 여자 골프는 양궁처럼 태극마크를 다는 것이 올림픽 메달 따는 것보다 더 힘들 수도 있다. 박인비는 현재 세계 랭킹 17위다. 
 
올림픽에 가려면 세계 랭킹 상위 15위 안에, 또 한국 선수 중 상위 4위 안에 들어야 한다. 16일 현재 한국 선수 중 고진영(1위), 박성현(2위), 김세영(6위), 이정은6(9위), 김효주(12위)가 박인비보다 앞에 있다. 박인비는 6번째다.  
 
통계로 보면 요즘 박인비 실력이 그의 20대 때 같지는 않다. 2013년 3연속 메이저 우승할 때 보이던 날카롭던 퍼트 감각은 무뎌진 듯했다. 2012년부터 3년간 1위를 했던 그린 적중 시 퍼트 수 순위는 2018년 13위, 지난해엔 26위까지 밀렸다. 샷 거리도 2012년 41위에서 지난해 145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박인비는 숫자로 드러나지 않는 기적을 만드는 선수이기도 하다. 올림픽이 열리는 2016년 박인비는 손가락 부상으로 거의 경기에 나서지도 못했다. 일부 팬들은 기사 댓글난에 그 실력이면 올림픽 출전을 양보하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박인비는 부상 속에서도 출전을 강행했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올림픽 후 부상 후유증으로 또 한참을 쉬던 박인비는 2017년 초 복귀하자마자 우승했다. 2017년엔 허리가 아파 하반기를 거의 쉬었다. 경기 감각이 부족한데도 2018년 복귀 두 번째 대회인 뱅크 오브 호프 파운더스컵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오랜 공백을 겪다 복귀 후 곧바로 우승한 전례는 흔치 않다. 박인비는 혼자서 세 번을 했다.
  
이번 대회에서 박인비의 날카로운 자객 기질이 다시 번뜩였다. 바람은 꽤 강했고 그린은 아주 딱딱했다. 6, 8, 9, 10번 홀에서 박인비는 만만치 않은 파 퍼트를 앞에 뒀다. 분위기는 보기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예전에 그런 것처럼 박인비는 표정없이 퍼트를 쑥쑥 집어넣었다. 실수가 실수를 낳게 하지 않는 집중력과 대형사고를 내지 않는 안정감도 다시 나왔다.
  
이 대회 우승으로 박인비의 세계 랭킹은 뛰어오르게 된다. 여자 골프 한국 대표가 누가 될지는 짙은 안개 속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조용한 자객은 일본 도쿄로 갈 채비를 하고 있다.  
 
성호준 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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