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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찌·프라다···명품만 거쳤던 그의 돌변 "옷에 시간쓰지 마라"

중앙일보 2020.02.16 05:00
“최근 2년 동안 10번도 넘게 한국에 왔어요.”
유수의 럭셔리 패션 브랜드를 총괄했던 이탈리아인 패션 디자이너 알렉산드라 파치네티의 말이다. 국내엔 생소한 이름이지만, 그는 유럽을 중심으로 한 럭셔리 패션업계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 인사다. 20년 전 디자이너 톰 포드로부터 ‘구찌’ 여성복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물려받은 것으로 시작해 ‘프라다’ ‘미우미우’ ‘발렌티노’ ‘몽클레르’ ‘토즈’로 자리를 옮기며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2016년 토즈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마지막으로 럭셔리 브랜드를 떠났던 그가 최근 한국에 10번 이상 왔었다니 무슨 일일까. 지난 2월 11일 오후 잠실의 한 카페에서 그를 직접 만났다.  

'할란앤홀든' 디자이너 된 알렉산드라 파치네티의 선택

지난 2월 12일 오후 패션 디자이너 알렉산드라 파치네티가 인터뷰 후 자리를 옮겨 서울 잠실 롯데월드몰의 할란앤홀든 매장에서 포즈를 취했다. 장진영 기자

지난 2월 12일 오후 패션 디자이너 알렉산드라 파치네티가 인터뷰 후 자리를 옮겨 서울 잠실 롯데월드몰의 할란앤홀든 매장에서 포즈를 취했다. 장진영 기자

 
카키색 니트 스웨터에 눈을 회색과 검정 아이섀도로 검게 칠한 그가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꽂혔다(※눈을 어둡게 화장하는 '스모키 아이'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40대 후반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배우나 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아름다운 모습의 그는 강렬한 화장과는 다르게 푸근한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파치네티는 올해 패션 브랜드 ‘할란앤홀든’(Harlan+Holden)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다시 세상에 나타났다. 그의 등장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미국 매체 뉴욕타임즈다. 지난 1월 24일 뉴욕타임즈는 파치네티 디렉터와의 인터뷰를 보도하며 “구찌·토즈·발렌티노를 총괄했던 디자이너가 전혀 예상치 못한 행보를 보였다”며 “패션업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신생 브랜드로 알렉산드라가 이동한 것은 충격”이라고 했다.
그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부임한 할란앤홀든은 특이한 이력을 가진 브랜드다. 2015년 필리핀의 한 유통기업이 마닐라에서 처음 브랜드를 설립했지만, 3년 전 한국으로 본사를 옮긴 후 ‘서울을 기반으로 한 컨템포러리 브랜드’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한국 매장 4곳을 포함해 아시아 지역에서 20여 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 잠실 롯데월드몰에 있는 할란앤홀든 매장은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의 건축가로도 유명한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맡았다. 매장 같은 일반 상업공간으로는 그의 첫 작품이다. 여러 프로젝트를 함께 했던 알렉산드라 파치네티의 요청으로 성사된 일이었다. 장진영 기자

서울 잠실 롯데월드몰에 있는 할란앤홀든 매장은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의 건축가로도 유명한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맡았다. 매장 같은 일반 상업공간으로는 그의 첫 작품이다. 여러 프로젝트를 함께 했던 알렉산드라 파치네티의 요청으로 성사된 일이었다. 장진영 기자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디자인 할 기회를 원했다.”
이제 시작이나 마찬가지인 브랜드를 선택한 이유를 묻자 돌아온 답이다. 그는 “오랜 시간 럭셔리 브랜드에서 일하면서 ‘다음에 올 트렌드는 뭘까’만을 고민했다. 패션은 창의성이 중요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하는 일은 매번 비슷했다. 이젠 더이상 디자이너로써 '뻔한'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다양하고 새로운 방법으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는 것. 또한 그는 "평소 한국을 역동적 에너지가 가득한 곳으로 생각해왔기 때문에 서울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 더 마음에 들었다"며 "여느 브랜드와는 '다른' 패션을 보여주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처음 브랜드에 합류한 후 한 일은 무엇인가.
“옷을 디자인하기에 앞서 ‘브랜딩’부터 했다. 나이키의 글로벌 마케팅 에이전트로 유명한 ‘와이든 앤 케네디’와 함께 몇 개월간 기본부터 다시 잡고, 첫 작업으로 매니페스토(공약)를 세웠다.”
 
매니페스토를 만드는 패션 브랜드는 처음이다.
“그것을 위해 쓸 시간이 없다(Ain't got time for that). 설명하면, 불필요한 일을 없애서 사람들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옷을 입고 벗고, 관리하는 데 드는 시간을 줄여서 더 가치 있는 곳에 사용하자는 취지다. 특히 소중한 사람과 함께 지내는 시간을 늘리길 바란다. 이는 우리가 패션 브랜드와 함께 운영하는 커피 브랜드 ‘비코즈 커피’까지 관통하는 핵심 가치다. 지난해 서울 종로에 3호점을 낸 비코즈 커피에선 주문이나 음료 수령을 위해 줄을 서지 않는다. 미리 휴대폰으로 주문하고 음료가 다 만들어지면 바로 데스크에서 찾아가는 방식으로만 카페를 운영한다. 커피 한 잔을 사기 위해 줄을 길게 서고 기다렸던 손님들의 시간을 아끼기 위한 방식이다."
 
시간을 아껴주는 패션이란 어떤 것인가.
"세탁기로 빨래할 수 있고, 다림질을 안 해도 되는, 관리하기 쉬운 소재로 만든 옷이다. 종류로는 니트 스웨터와 바지가 많은데 이 역시 입고 벗기 쉬운 옷을 고민한 결과다." 
 
관리가 쉽고 가성비까지 좋은 소재란 어떤 것들인가.
“먼저 디자인을 결정하고 그 디자인에 가장 적합한 원단을 찾는 방식으로 소재를 선택한다. 예를 들어, 니트는 합성섬유에 메리노 울이나 캐시미어 혼방 원단을 주로 사용한다. 보온성과 통기성이 좋은 동시에 가벼운 손빨래로 세탁할 수 있어 관리가 쉬워진다. 부드러운 촉감과 통기성을 위해서는 피마 코튼(미국·호주 등에서 나는 고급 면)과 대나무 소재를 섞고, 구김 없이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에는 비스코스를 사용하는 식이다.”   
 
럭셔리 브랜드에서의 경력과는 다른 길이다.
"럭셔리 브랜드에서 일할 때 '타임리스'(영속성이 있는)한 옷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런데 결국 '영원한 패션'이란 언제나 입을 수 있는, 접근하기 쉬운 옷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 없이 입을 수 있고, 몇 년이 지난 뒤에 입어도 괜찮고, 어떤 옷과 함께 입어도 잘 어울리는 그런 옷 말이다. 그러려면 디자인이 단순해야 한다.”
 
개성 없이 무난한 옷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 않게 만드는 게 디자인의 힘이다. 절제됐지만 아름다운 옷이어야 한다."  
 
지금 패션 업계의 화두는 지속가능성이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우리 제품들은 모두 태양 에너지로 구동하는 공장에서 만든다. 플라스틱 사용을 줄인 것은 물론이고, 사무실에서 사용하는 종이량도 50%가량 줄였다. 하지만 이걸 밖으로 내세우진 않을 거다. 이건 당연히 지켜야 할 책임 같은 거니까. 내가 생각하는 한 단계 더 발전된 지속가능한 패션은 이번 시즌 재고를 다음 시즌에 팔아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옷을 만드는 것이다. 디자인은 있지만 트렌드는 없는 옷. 그래서 우린 다른 브랜드들이 다 하는 패션쇼도 하지 않을 생각이다."
 
윤경희 기자 ann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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