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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취약성은 나의 힘

중앙일보 2020.02.15 16:00
자기 약점 거리낌없이 드러낸 자아의 단단함… 잊고 있던 인생의 진리를 소환하다
 

양준일 신드롬의 진짜 이유
조지선 연세대학교 객원교수·인간행동연구소 전문연구원(심리학 박사)

'90년대 GD’라 불리는 양준일. 그는 1990년대 활동했지만 큰 빛을 보지 못하고 잊혀졌으나 최근 뉴트로 열풍에 재조명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사진:일간스포츠

'90년대 GD’라 불리는 양준일. 그는 1990년대 활동했지만 큰 빛을 보지 못하고 잊혀졌으나 최근 뉴트로 열풍에 재조명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사진:일간스포츠

양준일 신드롬은 한국 대중 문화에서 새로운 현상이다. 유사 사례를 찾으려면 남아공으로 가야한다. 1970년 초 미국에서 두 장의 앨범을 내고 사라진 무명가수 식스토 로드리게즈(Sixto Rodriguez)는 10년 후,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남아공의 대스타가 되어 있었다. 엘비스 프레슬리보다 더 많은 앨범이 팔리고 밥 딜런에 버금가는 뮤지션이라는 칭송을 들을 정도였지만 정작 본인은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건설 현장의 저임금 노동자로 살고 있었다. 자살했다고 소문이 파다하게 난 그를 찾아나선 것은 극성 팬들이었다. 1998년, 그는 남아공에서 열린 콘서트를 통해 드라마틱하게 부활한다. 픽션보다 더 극적인 이 이야기가 다큐멘터리 영화 ‘서칭 포 슈가맨(Searching for Sugar Man)’에 담겼다.
 
1990년대 초, 앳된 재미교포 청년 양준일은 한국에서 두 장의 앨범을 냈지만 소수의 팬들에게만 반짝 스타였을 뿐, 그 시대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문화적 이질감 때문이었다. 남잔지 여잔지 모르겠다는 비아냥을 들었고, 예사롭지 않은 몸짓과 패션은 퇴폐적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무대에서 노래를 할 때는 신발과 돌, 모래가 날아왔다. 영어가 많이 섞인 가사가 바른 언어 생활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기도 했고 심지어 “너 같은 사람이 한국에 있는 게 싫다”는 말도 들었다. 그 어느 곳에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동양인이기에 미국에서 무시당했던 아픔보다 어쩌면 더 서러운 차별을 고국에서 맛보았을 지도 모른다.
 
 

기폭제는 ‘자기 개방’ 힘 보여준 진실된 ‘말’

가수 양준일이 활발하게 활동한 1990년대 초반의 방송 모습. / 사진:방송 캡처v

가수 양준일이 활발하게 활동한 1990년대 초반의 방송 모습. / 사진:방송 캡처v

그리고 30년이 흐른 시점에 누리꾼들은 1990~2000년대 인기가요를 스트리밍하는 온라인 영상 플랫폼에서 그를 발굴한다. “30년 전, 저 의상 실화임?” “지디(지드래곤)인줄 알고 클릭했다가 양준일에게 반했다.” “91년에 태어난 내가 91년에 데뷔한 가수한테 빠질 줄이야.”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이 무명 가수는 ‘온라인 탑골공원 지디’, ‘시간여행자’, ‘시대를 앞서간 비운의 천재 가수’로 불리며, 원년 팬들부터 새로 입덕한 Z·Y세대까지 광폭 팬덤을 확보한 스타가 되었다.
 
양준일은 방송사 JTBC 음악프로그램 ‘투유 프로젝트 슈가맨’의 시즌 1 시절부터 섭외 대상 1순위였지만 그를 현실로 소환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소문만 무성한 채 그의 행방이 오랫동안 오리무중이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슈가맨’의 제작진이 미국 플로리다의 한인 식당에서 서빙 직원으로 일하는 그를 섭외하는데 성공했고, 그는 지난해 12월 방송 무대를 통해 영화처럼 부활한다.
 
양준일 신드롬의 배후엔 짜릿함을 배가하는 요소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심금을 휘젓는 언더독 스토리, ‘세상에 이런 일이’ 급의 전례가 없던 문화 현상, 기획사가 아닌 대중이 발굴하고 소환한 스타, 힙한 문화 코드가 요구하는 젠더리스(genderless)와 에이지리스(ageless) 속성이 기묘하게 흘러나오는 50대 아재의 반전 매력.
 
이런 요소들이 열풍에 연료을 공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만으로는 전 세대를 아우르는 팬덤의 뜨거운 반응을 이해하기 힘들다. 양준일이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울림을 준 이유는 무엇일까? 신드롬의 기폭제 역할을 담당한 것은 자기 개방(self-disclosure)의 힘을 제대로 보여준 그의 진실된 ‘말’이었다. 인터뷰를 통해 전달된 그의 담담한 자기 표현을 들어보자.
 
“다달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2주 동안 쉬면 월세를 못내요… 음식점이 바쁘기 때문에 서버가 빠지면 그 자리를 누가 빨리 채워야 해서 제가 돌아오면 일자리가 사라질 수 있어요. 그런데 사장님이 한국에 갔다오라고… (카메라를 보고 활짝 웃으며) 써니 누나~ 감사합니다. 일자리 잡아둔다던 약속 지키셔야 합니다~” - ‘슈가맨’ 출연 당시.
 
“저는 주로 팬미팅을 버거킹에서 감자 튀김을 먹으면서 했어요. 이번에도 커피를 마시며 얘기하는 팬미팅을 상상했었는데...” - 팬미팅 현장에서.
 
(우리가 못 본 동안 어떤 삶을 살았나?”는 앵커의 질문에) “제 머리 속의 쓰레기를 많이 버려야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했어요. 나의 과거가 곧 나의 미래로 이어질거라는 생각을 버리고 싶었어요. 내 머리에 가득차 있는 내 자신에 대한 편견을 버리기 위한 노력을 ‘생활’처럼 했어요.” (다 버렸더니 남는 것은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남은 것은 ‘공간’이었던 것 같아요. 새로운게 들어올 수 있도록 공간을 나의 과거로 채우지 않는 게 목적이었어요.” - JTBC 뉴스룸 인터뷰에서
 
“제가 이해하기로 이 자리는 탑 배우같은 분들만 나오는데, 저는 그냥 서버인데 어떻게 이 자리에 있는 건지…” - 뉴스룸 출연 후, 스태프와의 대화에서
 
 

‘있어빌리티’ 시대에 실제 모습 보이며 신드롬

아직도 그를 기억하는 팬들에겐 한 때나마 빛나는 스타였는데 힘겨운 현실을 말하기가 무안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말의 내용보다 더 신선한 반전은 망설임이나 부끄러움의 흔적없이 자신의 현실을 담백하게 풀어내는 해맑은 표정이었다. 잔잔한 행복감마저 스치는 그 평온한 모습이 ‘양준일 현상’의 시발점이었을 것이다.
 
세간의 평은 이랬다. “표정만 보면 험난하고 멸시받는 삶이 아닌, 꽃길만 걸어온 사람같다.” “품격이란 이런 것.” “이 형님, 왜 이렇게 사랑스러우실까.” 아마도 대중이 마주한 것은 얼굴 너머에 있는 그의 견고한 자아가 아닐까? 대중이 그에게 느끼는 감정은 생활고를 털어놓는 과거 연예인을 향한 동정심과는 거리가 멀다. 세월을 버티고 순수하게 돌아온 사람을 귀하고 중하게 여기는 마음에 더 가까울 것이다.
 
있어빌리티(있어보이게 하는 능력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있어보인다’와 능력을 뜻하는 ‘어빌리티(ability)’를 결합한 용어) 시대다. 자랑질이나 허세, ‘척’으로 치부됐던 행동이 이제는 셀프 브랜딩을 위한 고도의 연출 능력이자 사회적 기술로 승격된 느낌이다. 지저분하고 아픈 현실을 드러내며 방구석을 점령한 잡동사니를 포토샵으로 싸악 도려내고 있어보이는 단편들만 클로즈업한 사진을 소셜 미디어에 게재해도 이게 행여 속임수가 아닐까 고민하지 않는다. 이는 자기 과시의 경연장인 SNS에서 보편적인 자기 제시(self-presentation) 방법일 뿐이다.
 
재산과 지식, 사회적 인맥과 문화적 자원, 개인의 취향과 감성까지도, 그게 무엇이든 가진 것을 과장하거나, 실제로 없는데 있는 것처럼 포장한다. 내가 이렇게 잘 먹고, 이렇게 많이 알며, 내 취향이 이렇게 고급지다고 은근히 드러내는 것이다. 방구석이든, 마음 속이든, 내 안에 숨겨진 취약점(vulnerability)를 드러내는 것은 일종의 자해 행위나 다름 없다.
 
양준일이 대중의 마음을 파고 들 수 있었던 까닭은 이 시대 흐름을 거스르며 자신의 취약성을 거리낌없이 드러낸 그 자아의 단단함에 있다. 테드 역사상 가장 많은 조회 수를 기록한 강연 중 하나의 주인공인 브르네 브라운 교수는 취약성과 수치심을 연구하는 학자다. 그는 자아의 약한 부분을 남에게 드러내는 용기는 자신이 가치있는 사람이라고 믿을 때만 가능한 일이라고 강조한다. 이 관점을 빌리면 양준일은 자신을 사랑하고 스스로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이다. 심장을 의미하는 라틴어 ‘cor’에서 나온 용기(courage)라는 단어의 본래 정의는 ‘내가 누구인지를 진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어떤 시행착오를 겪었는지, 사랑받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를 전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용기다.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수용하고 이를 타인에게 드러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을 모질게 다루지 않는다. 자신을 측은히 여길 줄 아는 이 사람은 남들에게도 너그럽고 관대하다. 이런 사람에게서 우리는 위로를 얻는다. 그를 통해, 나만 빼고 다 잘났고 행복한 세상이 아니라 누구나 못 난 데가 있고 상처로 아파한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아픔에 지지 않고 맑게 긴 세월을 살아낼 수 있다는 희망도 본다. 댓글을 통해 대중이 서술한 소회도 이와 결이 같다.
 
“청년들한테 이런 어른이 필요하다.” “인간극장도 아닌데 보는 내내 눈물이 난다. 겸손한 영혼.” “힘든 삶을 살고 있는 나에게도 희망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바보 소리 듣더라도 하루하루 착하게 성실히 살 것이다.” “과거를 버리고 남은 게 뭐냐는 질문에 ‘공간’이라고 대답하는 것을 보고 눈물이 났습니다. 버리면 비워둬야 하는데, 두려움에 자꾸 무언가를 채우려 했던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어요.”
 
자신의 ‘찌질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늘 타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 자신을 ‘존중’하고, 나의 말을 듣는 이를 ‘신뢰’하며, 가짜가 아닌 ‘진실’을 이야기할 때, 비로소 나의 취약성은 타인의 마음을 여는 열쇠가 된다. 그리고 이 조건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짜 연결이 시작된다. 양준일 신드롬은 스타와 팬의 관계에 이 연결 법칙이 적용된 한 예가 아닐까? “행여 나를 불쌍한 사람으로만 보면 어떡하지?” 이런 의심없이, 과거의 스타는 자기 이야기를 ‘듣는 이’들의 품위를 믿었고 대중은 마음을 열고 그에게 지지를 보냈다.
 
 

멋진 모습만 정제하는 삶은 나를 지치게 한다

브라운이 긴 연구를 통해 얻은 결론은 자신의 취약성을 인정하는 정도야말로 그가 얼마나 용기있는 사람인지를 가장 정확하게 알려주는 지표라는 것이다. 어제 찍었다고 해도 믿을 만큼 트렌디한 30년 전 영상 속의 세련된 가수의 모습은 놀라운 감상을 제공했지만 그의 진솔한 언어는 감동을 선사했다. 양준일의 존재감이 발현된 시점은, 결과를 확신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직한 자신의 모습을 노출한 순간이었다.
 
진취적이고 열정적인 인재로, 노련하고 능력있는 리더로 사는 멋진 모습만을 정제해서 남에게 보여줘야 하는 삶은 나를 지치게 한다. 약점과 상처가 혹시나 만천하에 드러나지 않을까 염려하는 삶은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남들은 몰라도 나는 안다. 내가 뭘 감추었는지. 그래서 자신을 가치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인생의 반전 매력은 이거다. 약함을 수용할 때 내가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취약함을 드러낼 때 세상에서 내 존재가 더 강하게 빛을 낸다는 것. 양준일 신드롬이 우리가 잊고 있던 이 진리를 소환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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