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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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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전화선부터 끊었다···체르노빌·우한, 소름돋는 쌍둥이

중앙일보 2020.02.15 05:00
※ 어려운 국제정세를 영화를 통해 쉽게 풀어낸 [임주리의 영화로운 세계]가 2020년 시즌2로 독자 여러분을 다시 찾아갑니다.
 

“시진핑은 ‘중국판 체르노빌’의 사태에 직면해 있다.”(파이낸셜타임스)

 
신종 코로나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으로 큰 위기를 맞은 중국에서 최근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미국 드라마가 있습니다. HBO 드라마 ‘체르노빌’(2019)인데요.  
 
중국 우한에서 신종 코로나 감염 환자를 돌보고 있는 의료진의 모습. [EPA=연합뉴스]

중국 우한에서 신종 코로나 감염 환자를 돌보고 있는 의료진의 모습. [EPA=연합뉴스]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 당시 소련 정부의 대응과 현재 중국 정부의 그것이 소름 끼치도록 비슷하다는 이야기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시진핑 국가주석을 대놓고 언급할 수 없으니 드라마에 빗대 정부를 비판하는 거죠.  

 
철저히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드라마의 어떤 점이 중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체르노빌과 현재의 중국 상황, 5가지 점에서 놀랍도록 비슷하더군요. 임주리의 [영화로운 세계]에서 짚어봤습니다.

 

1. 계속된 경고를 무시했다

체르노빌.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체르노빌.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미국 HBO 드라마 '체르노빌'. 원전 폭발 후 소방관들이 화재를 진압하는 모습.

미국 HBO 드라마 '체르노빌'. 원전 폭발 후 소방관들이 화재를 진압하는 모습.

 
1986년 4월 26일 소비에트연방(소련)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북부 도시 프리피야트. 잠에서 깬 루드밀라의 눈에 저 멀리서 번쩍, 빛줄기가 보입니다.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데 소방관인 남편 바실리가 긴급 호출을 받자 루드밀라는 불안해집니다.  
 
이 시각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원전). 직원들은 패닉에 빠졌습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올라오지만, 현장 책임자 디아틀로프는 단순 화재일 뿐이라고 역정을 냅니다. 눈앞에서 사람들이 피를 토하는데 말이죠.

지역 위원회에선 긴급회의가 열리고 한 의원이 “보고보다 심각한 것 같으니 주민들을 대피시켜야 한다”고 경고하지만, 위원장의 한마디에 오히려 도시가 봉쇄되고 맙니다.

 

“위험하지 않다고 국가가 말하고 있네. 인민들이야 경찰을 보면 겁을 먹을 거야. 도시를 봉쇄하게. 전화선을 끊어 그릇된 정보의 확산을 막게.”

 
결국 사고 지역 주변 30km 이내 주민들에게 대피령이 내려지지만, 방사능 낙진은 영국과 스웨덴까지 날아간 후였습니다. 드라마가 진행되는 내내 이런 일이 반복됩니다.  

 
신종 코로나 실태를 외부에 최초로 알린 중국 의사 리원량의 모습. [뉴스1]

신종 코로나 실태를 외부에 최초로 알린 중국 의사 리원량의 모습. [뉴스1]

 
2019년 12월 중국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

 
안과 의사 리원량은 진료를 보던 중 몇몇 환자에게서 이상 소견을 발견합니다. 2003년 창궐했던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와 증상이 비슷했죠. 리원량은 온라인 메신저를 통해 이 상황을 알리지만 며칠 후 공안에 끌려갑니다. ‘유언비어를 유포해 사회 질서를 해쳤으니 범법 행위를 중단하라’는 말에 ‘알겠다’고 서명한 후에야 풀려나죠.  
 
결과는 지금 뉴스에 나오는 그대로입니다.  
리원량을 비롯한 의사들의 경고를 무시한 탓에 신종 코로나는 일파만파 퍼져나갔습니다. 중국 정부가 우한을 봉쇄한 지난달 23일에는 이미 500만명이 우한을 빠져나간 뒤였죠.  
 

2. 보고 절차 복잡했고 책임 떠넘기기 급급했다

미국 HBO 드라마 '체르노빌'의 한 장면. 원전 직원들이 공포에 질려있다.

미국 HBO 드라마 '체르노빌'의 한 장면. 원전 직원들이 공포에 질려있다.

 
원전 폭발과 같이 엄청난 재앙이 터지면 최고 지도자의 올바른 지휘도 중요하지만, 현장을 잘 아는 실무진이 순발력 있게 대처하는 일도 그만큼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이들에게 권한이 있어야 하는데 경직된 관료사회, 특히 독재 국가에서 이는 매우 힘든 일이죠. 실무진은 복잡한 보고 절차에 주눅이 들고, 종국에는 책임 떠넘기기에만 급급해집니다.

 
‘체르노빌’에도 이런 '웃픈' 장면이 나옵니다. 발전소장이 높으신 분들께 보고하는 장면이죠. 
“제가 마린 부서기관에게 보고했고, 마린이 프롤리셰프 부서장에게, 프롤리셰프가 중앙위 위원 돌기크에게, 돌기크께서 고르바초프 서기장께 보고했습니다." 
이 중요한 일을 알리는데 대체 몇 다리를 거쳐야 하는 건지요. 그는 슈체르비나 에너지부 장관이 현장에 오자 한달음에 달려가 서류를 건넵니다. 엄청난 기밀정보인 줄 알았는데…. 그는 이렇게 말하죠.
 
“책임 소재가 있는 인원 명단입니다, 장관님.”

 
발전소장이 엔지니어를 탓한 것과 마찬가지로 소련 정부는 이 모든 죄를 발전소장 등에게 뒤집어씌웁니다. “우리가 알고 싶은 건 (진실이 아니라) 잘못을 씌울 자”(‘체르노빌’에서)이기 때문일까요.

 
신종 코로나 환자를 긴급히 옮기고 있는 의료진의 모습. [AP=연합뉴스]

신종 코로나 환자를 긴급히 옮기고 있는 의료진의 모습. [AP=연합뉴스]

 
2020년 2월 중국 우한.

상황은 너무나 비슷하게 흘러갑니다. 사태가 심각해지며 민심이 동요하자 시진핑 국가주석은 후베이성과 우한시 당서기를 경질했습니다. 저우셴왕 우한 시장은 진작 “(이 사태를 통솔할) 권한이 내게는 없었다”고 토로했는데 말이죠.  
시진핑을 향한 중국인들의 분노는 점점 커지고만 있습니다.  
 

3. 정보 공개 쉬쉬하고 차단에만 힘썼다

미국 HBO 드라마 '체르노빌'의 한 장면. 수습을 위해 크게 애를 쓴 슈체르비나 장관과 레가소프 교수.

미국 HBO 드라마 '체르노빌'의 한 장면. 수습을 위해 크게 애를 쓴 슈체르비나 장관과 레가소프 교수.

 
큰일이 터질수록 그 무엇보다 중요한 건 ‘투명한 정보 공개’입니다.

1986년의 체르노빌은 어땠을까요.  
 
원전 폭발 사후 처리를 위해 밤낮없이 일하던 슈체르비나 장관은 자신과 함께 일하던 핵물리학자 레가소프 교수에게 조용한 산책을 제안합니다.  
 
‘바빠 죽겠는데 웬 산책이냐’ 불평하던 레가소프 교수는 낯선 이들이 따라오는 걸 보고서야 장관의 의중을 눈치채죠. KGB(소련 정보기관)가 감시하고 있었던 겁니다.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해보려 애쓰는 이들을 도와주기는커녕 혹시나 이 일을 소문낼까 걱정해 도청은 기본이요 미행까지, 이들을 감시하는 데만 힘을 쏟은 겁니다.

 
사고 원인 조사를 위해 백방으로 뛰던 핵물리학자 울라나는, 심지어 도서관에서 논문 대출마저 거부당하는데요. 소련 정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보를 은폐하고, 진실을 캐내는 사람들의 입을 막는 데만 전력을 다한 겁니다.  
 
지난 10일 처음으로 현장을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그러나 우한이 아닌 베이징이었다. [중국 신화망 캡처]

지난 10일 처음으로 현장을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그러나 우한이 아닌 베이징이었다. [중국 신화망 캡처]

 
신종 코로나와 관련한 소문들이 퍼져나가자 중국 정부는 검열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헤이룽장(黑龍江) 성에서는 ‘유언비어 유포 시 최고 징역 15년형’ ‘정부의 지시에 따르지 않을 경우 사형’이란 특단 대책을 내놓기도 했죠. 정작 세계 각국에선 "중국 정부의 통계 발표를 믿을 수 없다"는 지적이 쏟아지는데 말입니다.
 

“거짓의 대가는 무엇인가. 거짓을 진실로 착각하는 것? 거짓의 진짜 대가란, 거짓을 끝없이 듣다가 진실을 인지하는 능력을 상실하는 것이다.” ('체르노빌'에서)

 
과연, 지금 거짓말을 하는 이는 누구일까요?

 

4. 환자들은 방치됐다

미국 HBO 드라마 '체르노빌'에서 피폭된 소방관과 그의 아내가 껴안는 모습.

미국 HBO 드라마 '체르노빌'에서 피폭된 소방관과 그의 아내가 껴안는 모습.

 
발전소 화재를 진압하러 갔던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루드밀라는 미칠 지경입니다. 수소문해보니 모스크바 병원으로 옮겨졌다네요. 피폭당한 사람과 접촉해선 안 되지만 그에게 방사능의 위험성을 제대로 경고해준 사람은 없었고, 루드밀라는 남편이 죽을 때까지 곁에 있게 됩니다. 그 후 홀로 아이를 낳지만 아이는 곧 죽고 말죠. 방사능의 무서운 후유증이었던 겁니다.  
 
그렇습니다. 소련 정부는 끝까지 피폭의 위험성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습니다.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에서 암 발병률이 대폭 증가했는데도 침묵했죠.
 

“방사능으로 인한 질병과 사망이 빈번했음에도 소련 정부는 공식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1987년까지 소련 정부가 내놓은 공식 사망자 수는 31명이었다.” (‘체르노빌’에서)  

 
지금 우한에선 중증 환자들이 방치돼 있습니다. 중국 정부가 치료보다 확산 저지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죠. 후베이성 내 사망률이 유독 높은 이유입니다.

 

5. 그럼에도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미국 HBO 드라마 '체르노빌'의 한 장면.

미국 HBO 드라마 '체르노빌'의 한 장면.

 
체르노빌 원전 사고에선 사후 처리가 무척 중요했습니다.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를 완전히 버려야 할 지경에 이르기 전에, 추가 폭발을 막고 발전소를 차폐하고 주변 땅을 갈아엎어야만 했죠.  
 
이때 나선 건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엔지니어들과 광부들 그리고 소련 전역에서 온 군인과 인부들이 방호복도 제대로 입지 못한 채 복구 작업에 나섰죠. 과학자들 역시 정부의 폭압 속에서도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들 덕분에 소련은 우크라이나 땅을 지킬 수 있었죠.
 
지금 중국에도 혼신의 힘을 다하는 의료진이 있습니다. 자원봉사자들도 속속 나서고 있죠. 이들 덕분에 그나마 환자들이 버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중국 우한의 한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의료진의 모습. [신화통신=연합뉴스]

중국 우한의 한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의료진의 모습. [신화통신=연합뉴스]

 
한편, 사후 처리를 지휘했던 레가소프 교수는 정부의 강요로 진실을 알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모든 사실을 녹취한 기록을 남기고 자살합니다. 드라마는 그 이후의 이야기를 전하며 끝나죠.

 

“그의 기록은 소련 과학자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그 죽음의 여파로 소련은 마침내 설계 결함을 인정했고, 재발을 막고자 반응로들이 개조되었다.”  

 
진실을 전하고 죽음을 택한 레가소프와 비교할 만한 인물은 의사 리원량입니다.  
리원량의 죽음 이후 중국에선 그의 사망일을 ‘언론 자유의 날’로 제정해야 한단 움직임이 일고 있죠. 젊은이들은 그 죽음을 애도하며 SNS에 “못하겠다”는 말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협박에 굴복하지 않겠단 뜻이죠.  
 
당시 소련을 이끌던 고르바초프는 추후 고백했습니다.  
“체르노빌 사고는 소련 붕괴의 진정한 원인일지 모른다”고요. 지금 이 말은 중국인들 사이에서 소리 없이 퍼지고 있습니다. 외신들은 신종 코로나가 '중국판 체르노빌'이라며 "시진핑의 리더십이 시험대에 올랐다"는 보도를 내고 있고요. 
 
중국 정부는 이 위기를 과연 어떻게 극복할까요? 드라마에서 거듭 강조하는 "거짓의 대가"가 무엇인지 새겨들어야 할 때 같습니다.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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