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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 생태계’ 만든 금융권력 블룸버그, 트럼프 대항마 꿈꿔

중앙선데이 2020.02.15 00:21 673호 12면 지면보기

[월스트리트 리더십] 미국 대선 - 다크호스 후보

블룸버그가 지난 13일 휴스턴에서 흑인 지지자를 상대로 연설하고 있다. 그는 흑인을 위한 공약을 발표하며 선거전에 뛰어들었다. [AP=연합뉴스]

블룸버그가 지난 13일 휴스턴에서 흑인 지지자를 상대로 연설하고 있다. 그는 흑인을 위한 공약을 발표하며 선거전에 뛰어들었다. [AP=연합뉴스]

2015년 4월 17일 오전 10시(런던 현지시간), 유럽 금융시장이 개장된 직후 수상한 기운이 감지됐다. 갑작스레 주가가 하락하고, 국채 거래량이 급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투자자들은 긴급하게 원인을 찾아 나섰다. 특별한 뉴스가 나왔는지, 미확인 루머가 도는 건 아닌지 레이더를 치켜 세웠다. 하지만 원인은 뉴스도 루머도 아니었다. 놀랍게도 범인은 투자자들의 책상에 놓인 ‘블룸버그 터미널’이었다. 정식 명칭은 ‘블룸버그 프로페셔널’이라는 소프트웨어. 월스트리트 기업 ‘블룸버그 LP’가 구독 형식으로 공급하는 금융정보 단말기다. 문제의 그 날, 블룸버그 터미널의 블랙아웃 사태가 벌어진 것이 시장 혼란의 주범이었다.
 

창업자도 사무실 없이 함께 근무
화장실 빼고 모든 벽은 투명 유리

위계질서 최소화, 수평적 조직문화
누구나 자유롭게 아이디어 제시
월스트리트 블루오션 시장 만들어

블랙아웃이 불러온 파장은 상상을 초월했다. 2시간 반 동안 이어진 블랙아웃으로 주식시장은 급등락을 반복하고 독일 국채선물 거래량은 평상시의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유럽 금융당국도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영국 재무부는 같은 날 오전 10시에 예정돼 있던 국채 입찰을 전면 연기해야만 했다. 더구나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커지고 시장의 불안감이 높아지자 영란은행(영국 중앙은행)은 “필요 시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겠다”라고 하며 시장의 불안 심리를 달래고 나섰다.
  
은행·연기금, 블룸버그 터미널 사용
 
그런데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대체 일개 민간기업의 금융서비스가 어떤 역할을 하기에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블룸버그 터미널은 금융시장의 ‘큰 손’인 은행·연기금·헤지펀드 등의 투자 의사결정 과정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시장 가격을 모니터링하고, 적정 가치와 위험도를 계산하고, 거래를 체결하고, 다른 투자자들과 소통하는 데 필수적인 존재다. 비유하자면 블룸버그 LP는 투자 업계의 애플 같은 기업이다. 애플이 아이폰에 일상의 생태계를 구현한 것처럼 블룸버그는 블룸버그 터미널에 투자의 생태계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애플의 운영시스템 ‘iOS’가 다운돼 당신의 아이폰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상상해 보라. 2015년 4월 17일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마이클 블룸버그가 월스트리트의 금융정보 욕구를 충족시키며 크게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투자은행 ‘살로먼브라더즈’ 15년 경력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트레이더로 일했기 때문에 앞으로 주요 고객이 될 트레이더가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블룸버그는 트레이더로 일하며 제대로 된 금융정보를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실감했다. 게다가 회사를 떠나기 직전에는 기술지원 부서의 책임자로 일했기 때문에 서비스 제공의 기반인 정보기술(IT)에도 능통했다.
 
그러던 중 블룸버그는 1981년에 살로먼브라더즈가 매각되며 직장에서 해고 당했다. 해고의 대가로 거금 1000만 달러를 챙긴 블룸버그는 곧바로 월스트리트 최초 핀테크 스타트업 블룸버그 LP를 창업했다.
 
블룸버그는 금융정보를 무기 삼아 월스트리트에서 최고 권력과 부를 동시에 거머쥘 수 있었다. 블룸버그가 가진 권력은 ‘네트워크 효과’에 기인한다. 블룸버그 LP는 혁신적인 금융정보서비스를 개발한 첫 기업으로서 ‘선도기업의 이점’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웬만한 금융회사들은 모두 사용하는 ‘업계 표준’을 보유한 덕분이다.  
 
블룸버그 터미널에 기반을 둔 생태계에 참여하지 않으면 투자 활동을 할 수 없을 정도다. 이 같은 블룸버그 LP의 위상을 방증하는 것이 가격 정책이다. 블룸버그 LP는 블룸버그 터미널 1회선당 연 사용료 2만4000달러라는 초고가 정책을 펼치고 있다. 가격 할인에도 인색해 2회선 이상을 구독하면 회선당 2만 달러로 할인해 주는 것이 혜택의 전부다.
 
블룸버그 LP는 네트워크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으로 블룸버그 터미널의 콘텐트를 지속적으로 확장해 나갔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뉴스이고, 블룸버그 뉴스가 만들어내는 모든 콘텐트는 블룸버그 터미널을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같은 ‘터미널 최우선 전략’은 블룸버그 LP의 수익 구조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시장의 추산에 따르면 2018년 기준 회사 전체 매출은 약 100억 달러에 이르고, 그중에서 블룸버그 터미널이 차지하는 비중은 80%에 달할 정도다.
  
뉴욕시장 3연임 이어 대권 도전 나서
 
블룸버그 L.P.

블룸버그 L.P.

금융정보서비스로 시작해 미디어 기업으로 성장한 블룸버그 LP의 조직문화에는 창업자 블룸버그의 리더십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수평적’ 문화다. 위계질서를 최소화하고 투명성을 강조해 누구나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문화다. 이는 블룸버그가 경험한 살로먼브라더즈 트레이딩룸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결과다. 탁 트인 트레이딩룸에는 개인 사무실이 따로 없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함께 트레이딩 데스크에 앉아 거래에 몰입한다. 블룸버그 LP도 마찬가지다. 어느 누구도 개인 사무실을 갖지 못한다. 직원들은 대형 트레이딩룸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한 뉴스룸에서 블룸버그 터미널을 앞에 두고 일한다. 심지어 창업자 블룸버그도 개인 사무실이 따로 없어 뉴스룸의 한켠에서 업무를 본다. 회의실을 비롯한 모든 방의 벽은 유리로 투명하게 만들어 화장실 벽만 가려져 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블룸버그는 뉴욕 시장 재임 시기에는 뉴욕 시청을 리모델링해 이른바 ‘불펜(Bullpen)’을 만들었다. 블룸버그의 뉴스룸을 본 따 벽을 허물어 개방된 공간에 시장을 비롯한 부시장들과 참모들이 함께 모여 일하는 공간을 조성했다).
 
또 다른 문화적 특징은 ‘선견지명’을 추구하는 데 있다. 블룸버그는 “고객의 니즈는 듣기만 하고 귀 기울이지는 마라”고 경고한다. 대부분의 경우 고객은 현재에만 사로잡혀 미래의 가능성은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객이 원하는 것은 이미 다른 경쟁자들이 제공하는 기능일 경우가 많아 이를 뒤쫓다보면 결국 레드오션에서 허우적거리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는 것이다. 블룸버그 터미널이 대표적인 선견지명의 산물이다. 블룸버그가 창업 당시 월스트리트의 니즈만을 따랐다면 지금 투자자들의 책상에는 1대의 블룸버그 터미널 대신 기능별로 수십대의 단말기가 놓여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는 사용자들이 미처 생각지도 못한 터미널 콘텐트를 개발하는 역량과도 직결된다.
 
월스트리트 대형 투자은행을 거쳐 기업가로 성공한 억만장자 블룸버그는 뉴욕 시장 3연임에 이어 대권 도전에 나섰다. 그런데 민주당 대통령 경선 후보 11명 중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경계하는 인물이 블룸버그다. 뉴욕 사업가 출신으로 자신과 가장 유사한 배경을 지닌 데다 정치 경력, 경영 감각, 재력 등에서 자신보다 훨씬 앞서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블룸버그는 자신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되든 안 되든 ‘트럼프 타도’를 목표로 사재를 동원해 막강한 화력을 퍼부을 거라고 예고한 상황이다. 블룸버그는 지난 대선에서 표심을 파고드는 디지털 선거 전략에서 트럼프 캠프에 뒤진 것이 중요한 패인이었다고 믿고 있다. 이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내린 결단이 ‘호크피쉬’의 설립이다(박스 기사 참조). 일찌감치 금융데이터의 가치에 눈을 떠 ‘월스트리트 금융권력’이 된 블룸버그가 이번엔 정치데이터를 발판삼아 ‘워싱턴 정치권력’으로의 변신에 성공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디지털 선거 비밀병기 ‘호크피쉬’ 만들어
지난해 4월 설립된 디지털기술 회사 ‘호크피쉬(Hawkfish)’는 한동안 비밀스럽게 활동했다.  
 
회사의 정체가 밝혀진 것은 지난 12월. 그때까지의 행적을 추적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호크피쉬는 지난해 11월 치러진 미국 지방선거에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거기간 동안 민주당을 위한 디지털 선거 전략을 책임진 것이다. 결과는 놀라웠다. 호크피쉬가 투입된 버지니아주와 켄터키주 모두에서 민주당이 승리한 것이다.  
 
모두 공화당의 텃밭으로 여겨지던 곳이라 2020년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에게 강력한 경고장을 날린 셈이 됐다.  
 
더 놀라운 건 호크피쉬 오너의 정체였다. 뒤늦게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든 마이클 블룸버그가 거금을 투자해 설립했기 때문이다. 이제 호크피쉬는 대권 도전에 나선 블룸버그의 당선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마이클 블룸버그(Michael Bloomberg)
블룸버그 L.P. 공동 창업자, 전 뉴욕 시장
출생 1942년(78세)
최종 학력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MBA(1966년 졸업)
개인 자산 675억 달러(2020년 2월 기준, 포브스), 미국 8위, 세계 9위
 
최정혁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
골드만삭스은행 서울 대표, 유비에스, 크레디트 스위스, 씨티그룹 FICC(Fixed Income, Currencies and Commodities, 채권·외환·상품) 트레이더로 일했다. 세종대 경영학부에서 국제금융과 금융리스크를 강의하며 금융서비스산업의 국제화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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