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현상의 시시각각] 당신들은 이미 승자다

중앙일보 2020.02.14 00:38 종합 30면 지면보기
이현상 논설위원

이현상 논설위원

너무 뻔한 말을 들으면 내용보다 말의 맥락부터 짚게 된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지금 코로나 대처가) 과거 정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잘하고 있다”고 한 말이 그런 예다.
 

전 정부 비교 코로나 자화자찬
아직도 과거와 싸우고 있는가
집권 세력답게 미래 고민하라

당연하지 않은가. 과거와 다를 바가 없다면 그게 이상하다. 현재는 과거의 퇴적 위에 서 있다. 2015년 메르스의 비극은 중동과 한국 사이의 아득한 거리가 주는 방심에서 시작됐다. 바레인에서 돌아온 첫 환자는 일반적 폐렴인 줄로만 알고 평택의 한 병원에서 치료받다 삼성서울병원으로 옮겨졌다. 이 환자로부터 감염된 14번 환자 역시 메르스인 줄 모르고 병원 응급실에서 사흘을 머물렀다. 그 과정에서 면역력이 약한 병원 환자들이 대거 감염됐다. 정부의 대응 미숙이 화를 키운 것은 새삼 지적할 필요조차 없다. 호되게 당한 뒤 방역체계가 정비됐다. ‘혼란이 우려된다’며 감추던 확진자의 동선이 낱낱이 공개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과거의 시행착오가 쌓여 현재의 자산이 된다는 것이 이정동 대통령 경제과학특보의 책 『축적의 길』의 요지다. 박 시장은 올해 시무식장에서 이 책을 간부들에게 추천했다. 이런 박 시장이 “정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감염병 대응도 달라진다”고 했다. 과학과 경험의 문제를 정치의 문제로 바꾼 박 시장에게 이 책을 다시 한번 정독할 것을 권한다. “박근혜 정부가 얼마나 무능했는지 낱낱이 증언할 수 있다” “영화는 봉테일, 나는 방역 박테일”이라는 박 시장의 말에서는 큰 꿈을 꾼다는 정치인답지 않은 용렬함이 느껴진다. 차라리 카뮈의 소설 ‘페스트’의 주인공처럼 자기 일을 묵묵히 하는 의료진들, 매출 감소를 감수하는 자영업자들, 불편에도 무릅쓰고 방역 대책에 협조하는 시민들에게 공을 돌렸으면 더 돋보였을 것이다.
 
진원지 중국에서는 아직도 사망자와 확진자가 급증하고 있다.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화자찬이 넘쳐난다. 이시종 충북지사는 “세계 최고 수준의 조기 수습 대책을 추진해 나가는 문 대통령에게 존경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여당은 “코로나와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아가고 있다”고 했다.
 
민망한 자찬의 말 속에는 과거와 싸우는 정부 여당의 정서가 담겨 있다. 새삼스럽지도 않다. 3년 가까운 집권 기간 내내 여권의 가장 큰 화두가 ‘적폐청산’ 아니었던가. 여당에 영입된 한 전직 판사는 자신이 사법농단의 피해자임을 강조했다. 드러나는 이야기는 좀 다르다. 오히려 법원행정처의 부당한 지시를 동료 판사에게 전달했다는 내부 증언이 나왔다. 인사 좌천 피해를 보았다는 본인의 주장도 의심받고 있다. 해당 판사는 ‘저의 사법개혁 의지를 저지하려는 분들의 억지’라고 몰아붙였다. 과거를 끌어대 명분을 확보하겠다는 계산은 법복을 막 벗은 판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과거와의 대결에서 현재의 명분을 찾는 심리 기저에는 무엇이 있을까. 저들의 과거는 아직 힘이 세고, 우리들의 현재는 아직 약하다는 정서일 것이다. 집권세력 스스로 그렇다고 믿는지는 의심스럽다. 그 힘세다는 검찰을 평정하고, 입법부 권한과 국민 알권리까지 무시하며 공소장을 감추는 권력을 누가 약하다고 할 수 있겠나. 결국 약자 코스프레로 지지세력을 결집하겠다는 전략이다.
 
떨쳐내지 못한 과거의 그림자 속에서 미래는 희미해진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다”는 봉준호 감독의 오스카 시상대 발언이 화제가 됐다. 과거와의 ‘적대적 공생’에서 비로소 존재의 가치를 확인하는 현 여권은 집권 이후 어떤 창의적 콘텐트를 보여줬는가. 혹시 조국 사태에서 보여준 도덕적 잣대의 이동? 5년마다 되풀이되는 권력의 비극을 막기 위한 20년 집권의 꿈? 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21대 총선은 미래와 과거의 싸움”이라고 말했다. 집권당은 이미 승자다. 승자가 보여주는 공동체의 미래는 조금 달라져야 하지 않겠나. 과거라는 셀로판을 갖다 대야 비로소 보이는 미래 같은 거 말고. 
 
이현상 논설위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