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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현의 시선] 청와대 민정수석의 직무유기

중앙일보 2020.02.14 00:38 종합 28면 지면보기
박재현 논설위원

박재현 논설위원

지난해 말 현 정부 실세와 저녁을 같이 했던 한 인사가 당시의 불편했던 감정을 전했다. 만찬이 끝나고 사진 촬영을 제의한 것 까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큰 의자 두 개가 들어오더니 부부는 앉고 자신들은 병풍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선거부정 통치권 차원 해명 필요
과거 사건 사과는 정치적 이벤트
흉흉한 민심 전달하는 역할 해야

“이건 뭐지…”
 
적이 당혹감은 자리를 나서면서 슬금슬금 분노로 변했다. “이러니 이 정부가 욕을 듣고 있는거지.” 문재인 정부 출범 전부터 각종 정책을 입안하고 조언을 했던 그는 “청와대 참모와 정부 관료들의 정국에 대한 인식은 정말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권력의 단맛이 공감 능력을 저하시키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의 기소가 부당하다며 검찰총장을 향해 ‘고위공직자 범죄수사처 1호 수사 대상’이라고 막말을 퍼붓었던 최강욱 공직기강비서관의 배짱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벼락출세를 하면서 이성을 잃은 것인가. 그의 상관인 김조원 민정수석의 존재감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김 수석이 민변 등 상대적으로 젊은 운동권 출신 비서관의 등쌀에 밀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혹시 노영민 비서실장이 김 수석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을 꺼리는 것은 아닐까. 두 사람은 2015년 사건을 계기로 불편한 관계인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의원으로 있던 노 실장이 출판기념회 때 카드단말기로 결제를 했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는 배경에 당무감사원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면서다. 당무 감사를 책임졌던 김 수석이 엄중 징계를 요청하면서 노 실장은 6개월의 당원자격 정지를 받고 총선에 불출마했다.
 
지난해 조국 사건을 시작으로 유재수·울산시장 선거·우리들병원 특혜 대출 사건 등이 잇따라 불거지고 이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극에 이르는 상황에서도 민정수석은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다. 소통수석이 나서 검찰을 비판하고, 비서관 개개인들이 각개 전투식으로 검찰 및 야당과 각을 세우는 것은 제대로 된 국정운영이라고 볼 수 없다.
 
특히 대통령의 30년 지기인 울산시장과 그의 선거 참모들, 청와대 비서관 등 13명이 기소된 울산사건이 불거진 지 석달이 지났는데도 이를 수습하기 위한 대책마련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검찰의 일방적 주장’ ‘허위 사실 적시에 따른 공문서 위조’ 라는 생각나는대로 떠드는 허언(虛言)만이 난무하고 있다.
 
상대방을 중상모략하는 문건을 작성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뒤에도 “검찰 수사가 오히려 나를 자유롭게 해줬다. 재판 이후에도 나의 신변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말에는 티끌만큼 반성의 기미도 없다. 그런 사람에게 경제 정책을 맡기고 따랐던 시민은 무엇이며, 공업 도시로서의 재도약을 바랐던 국민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물론 이 정부 민정수석은 과거 정부와 달리 검찰 수사에 간여하지 않겠다고 밝힌바 있다. 하지만 민정(民情)이란 단어가 지니는 의미처럼 국민들의 생활 형편과 사정 등을 두루두루 살펴봐야 하는 기능까지 없앤 것은 아닐 것이다.
 
김 수석이 임명될 때 법조계에선 “그에겐 공직 기강 확립이 주요 임무이고, 법무·검찰과 관련된 일은 조국 신임 법무부장관이 담당할 것”이란 관측이 있었다. 하지만 조 전 장관이 각종 불법행위로 중도하차하면서 문 대통령의 이런 구상은 이미 엎어져버렸다.
 
경위야 어떻든 국가 수사기관에 의해 기소가 된 청와대 비서관이 마치 대통령이나 황제처럼 ‘쿠데타’ 운운하며 국민들에게 협박성 공갈을 늘어놓는데도 이를 눈감고 있다면 수석은 왜 있는 것일까. 대통령의 전직 비서 5명이 선거부정 사건에 연루된 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큰 오산이다.
 
여당의 많은 의원들이 걱정하고 있는 것처럼 저잣거리의 민심은 이 정부에게 결코 곱지만은 않다. 국민의 주권이 침탈당했고, 민주주의의 기본인 정의로운 선거가 부정당했다면 통치권 차원의 해명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꿀먹은 벙어리 전략’이 정치적으로 이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건가.
 
문 대통령은 취임 후 생각보다 여러차례 사과문을 냈다. 최저임금 1만원 달성을 못지키게 됐다는 이유로, 세월호 구조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가습기 희생자를 잘 보살피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과했다. 신군부 때인 1980년 발생한 10·27법난과 심지어 월남전에 대해서도 사과를 했다. 하지만 감동은 없었다.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것도 있었기 때문이다. 정작 필요할 땐 외면하거나 딴소리를 했다. 민정수석이라도 민심을 살펴야 한다. 이 정부가 적폐청산 때 활용했던 직무유기는 먼 곳에 있지 않다. 
 
박재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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