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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고용 연장’에 앞서 충분한 사회적 합의가 먼저다

중앙일보 2020.02.13 00:32 종합 30면 지면보기
문재인 대통령이 “고용 연장도 이제 본격적으로 검토를 시작할 때가 됐다”고 밝히면서 ‘정년 연장’ 이슈가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이 발언의 시기는 적절치 않다. 마침 총선을 코앞에 두고 있어서다. 보수 성향 고연령층의 표심을 겨냥한 발언이라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정년 연장이 터부시될 이유도 없다. 한국은 세계에서 고령화가 가장 빠르고, 생산가능인구가 2018년부터 감소하면서 고령자 노동력의 활용이 절실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노동 개혁 없이는 공무원과 양대 노조만 혜택
직무·성과에 따른 임금체계 갖춰야 도입 가능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고령 인력 활용에 반대할 사람은 없지만, 몇 가지 중대한 전제조건이 충족돼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전제는 생산성 향상과 임금구조 개편이다. 연공에 따라 급여가 오르는 호봉제 기반에서는 기업이 생산성 향상 없는 정년 연장을 감당할 재간이 없다. 지금은 연공급이 뿌리 깊었던 일본에서도 종신고용 신화가 무너져 직무와 성과에 따른 봉급체계가 확산하는 시대다. 예컨대 도요타는 이미 2004년 호봉제를 폐지했다. 그러고도 노사분규 ‘제로(0)’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노동개혁이 정년 연장의 길을 열었다.
 
우리는 이런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다. 경제 규모 12위에도 노동 유연성은 세계 130위에 머물고 있다. 그런데도 2013년 국회는 충분한 논의 없이 정년을 55~58에서 60세로 덜컥 늘렸다. 그때 임금피크제를 함께 도입해야 했지만, 국회가 법안에 포함하지 않았다. 후폭풍은 컸다. 강성 노조의 요구에 밀려 정년이 늘어난 기간에도 기업은 임금을 크게 깎지 못했다. 그 부작용은 신규 고용 위축으로 나타났다. 2015년 9.1%였던 청년실업률은 2016년 10%로 치솟았다.
 
여기서 정년을 ‘60+α’로 단숨에 늘리면 청년 고용은 더 어려워진다. 정부가 지난해 9월 기업에 고용 연장 의무를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하다 중단한 것도 이런 우려가 컸다. 지금도 달라진 것은 없다. 기업이 받아들일 여력도 없는데 무조건 추진하면 부작용만 심해진다. 더구나 기업이 경쟁력을 잃으면 GM 군산공장이나 조선사 직원처럼 고용 연장은 그림의 떡이 된다.
 
결국 고용 연장은 대기업·금융권·공기업을 포함한 200만 양대 노총 소속 근로자와 100만 명을 훌쩍 넘어선 공무원의 철밥통만 강화할 공산이 크다. 기업은 기업대로 신규 고용을 줄이고 나설 것이다. 이런 우려를 불식하려면 노동개혁이라는 시대적 요구가 사회적 합의를 통해 선행돼야 한다. 이 조건이 충족돼야 기업은 비로소 재고용·정년 연장·정년 폐지 등을 형편에 맞춰 선택하면서 고용 연장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586세대의 청년 착취가 될 수밖에 없다. 기업 활력을 죽이고 청년의 미래를 희생시키는 ‘나쁜 고용 연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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