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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 6개월 아닌 3년 소멸시효” 헌재 결정 인용한 첫 판결 나왔다

중앙일보 2020.02.12 17:49
대통령 긴급조치 9호 발령을 보도한 1975년 5월 13일자 중앙일보 1면. [중앙일보 DB]

대통령 긴급조치 9호 발령을 보도한 1975년 5월 13일자 중앙일보 1면. [중앙일보 DB]

 
긴급조치 피해자가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법원이 처음으로 소멸시효를 3년으로 인정했다. 소멸시효를 6개월이라고 판단한 대법원의 판례가 아닌 헌법재판소 결정에 따라 3년의 시효를 인정한 것이다.
 
서울고등법원 민사32부(재판장 유상재)가 A씨 등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정부가 2억 8000만원을 배상하라고 지난 28일 판결했다.  
 

1심 “6개월 소멸시효 지나 국가 배상 책임 없어”

1975년 대학생이던 A씨는 수사관들에게 영장 없이 체포 구금돼 그해 6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기소됐다. 수사관들은 A씨에게 북한과의 연계에 관한 자백을 강요하며 때리거나 머리를 욕조 물에 집어넣는 등 고문과 가혹행위를 했다. A씨는 체포돼 기소되기까지 가족이나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그는 329일 동안 구금을 당하고 다음 해 5월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30여년이 지나 재심을 청구한 A씨는 2013년 7월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2014년 8월 A씨는 본인을 포함해 돌아가신 부모님과 형제들의 손해배상 채권을 상속받아 국가를 상대로 정신적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문제는 A씨가 위자료를 청구한 시점이 형사보상결정 확정일로부터 6개월이 지났단 것이었다. 1심 재판부는 이를 이유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일부 인정하지 않아 정부에게 1억 6400만원을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이는 2013년 대법원이 긴급조치 피해 등 사건에서 재심판결 확정을 안 날로부터 6개월 이내에 위자료 청구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판결을 내린 탓이다. 당시 양승태 대법원은 민법상 소멸시효를 적용해 “형사보상결정 확정일로부터 6개월 안에 손해배상을 제기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2심, 대법원 판결 대신 헌재 결정 인용

그러나 2심 재판부는 대법원이 아닌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받아들였다. 헌재가 2018년 8월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 등에 대해 재심 무죄 판결 확정을 안 날로부터 3년 이내에 위자료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결정한 데에 따른 것이다.

 
1985년 국가보안법(간첩 등) 위반 혐의로 7년의 형을 살았던 B씨는 2005년 1월 제정된 과거사정리법에 따라 재심을 청구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B씨는 민법 제166조 1항 등에 대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정한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과 ‘중대한 인권침해·조작의혹 사건’ 등의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를 6개월로 정한 것은 부당하다”며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헌법재판소 전경. [연합뉴스]

헌법재판소 전경. [연합뉴스]

이에 헌재는 “과거사 사건은 국가기관이 국민에게 누명을 씌워 불법행위를 자행했음에도 현재까지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 채무를 변제하지 않은 것이 명백한 사안”이라며 피해자가 진실규명 결정 또는 재심판결 확정을 안 날로부터 3년 이내에 국가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과거사정리법에 규정된 사건들에 대해 일반적인 소멸시효인 6개월을 그대로 적용하기는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2심 재판부는 이런 헌재의 결정을 A씨에게 적용했다. 2심 재판부는 “이 사건은 과거사정리법에 규정된 중대한 인권침해사건·조작의혹사건에 속해, 피해자가 무죄판결 확정을 안 날로부터 3년 이내에 배상을 청구하면 소멸시효 기간을 지킨 것으로 볼 수 있다”며 1심 판단을 뒤집었다. A씨는 정부로부터 약 1억 1600만원을 더 배상받게 됐다.
 
백희연 기자 baek.heeyo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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