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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에는 성별이 없다…젠더리스 향수 인기

중앙일보 2020.02.12 10:56
한 해 중 향수 주가가 가장 많이 오르는 기간이 있다. 바로 이맘때, 연인들의 명절인 밸런타인데이를 앞두고서다. 좋은 향을 선물하는 것이 로맨틱하게 느껴질 뿐 아니라 가격대도 적당해서 높은 만족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밸런타인데이는 향수 업계의 대목이다. 롯데백화점에 따르면 지난해 밸런타인데이를 앞두고 2월 7일부터 13일까지 일주일간 향수 매출이 바로 전 일주일인 1월 31일부터 2월 6일까지 매출보다 40.1% 많았다.  
 

성별 굳이 구별하지 않는 성 중립 향수 인기
꽃 향은 여자, 우디 향은 남자…전통적 관념 뒤집어
번호로 이름 붙이고 병 모양도 단순하게

올해도 연인을 위한 선물을 사기 위해 향수 매장으로 향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 기억해 둘 것이 있다. 바로 요즘 향에는 성별이 없다는 것이다.  
향수업계의 대목으로 불리는 밸런타인 데이, 올해 향수 트렌드 중 하나로 '젠더리스'가 주목받고 있다. [사진 by alexey turenkov on Unsplash]

향수업계의 대목으로 불리는 밸런타인 데이, 올해 향수 트렌드 중 하나로 '젠더리스'가 주목받고 있다. [사진 by alexey turenkov on Unsplash]

지금까지 전통적인 향수들은 여성용과 남성용이 구분돼 있었다. 대부분 여성용 향수에는 꽃 향을 기반으로 상큼한 과일 향을, 남성용 향수에는 짙은 나무 향이나 풀 향 혹은 시원한 바다 향을 조합하는 경우가 많았다. 향수를 담는 병도 남성용인지 여성용인지 금세 알아차릴 수 있는 디자인이 대부분이었다. 남성용은 주로 파랑 혹은 검정 패키지에 각진 형태로, 여성용은 핑크나 금색 등 밝은 색 위주에 부드러운 곡선 형태로 출시됐다.   
 
향수 광고도 성별의 역할을 강조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남자 향수에는 근육질의 남자 모델이 등장하고 ‘남자를 위한 완벽한 향’ 같은 광고 문구가 붙는다. 반면 여성 향수에는 섹시하거나 귀여운 여성들이 등장해 그 향수를 뿌리면 하늘하늘한 몸매의 소녀나 관능적인 여인이 될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모델 데이비드 간디의 전설적인 향수 광고. 남성적인 매력을 극대화 했다. [사진 돌체앤가바나]

모델 데이비드 간디의 전설적인 향수 광고. 남성적인 매력을 극대화 했다. [사진 돌체앤가바나]

하지만 최근에는 여성용·남성용을 굳이 구별하지 않는 향수들이 많이 등장했다. 향으로 성별을 구분하는 고정관념을 무너뜨린 일명 ‘젠더리스(genderless)’ 향수 제품들이다. ‘젠더 뉴트럴(gender neutral·성 중립적인)’ 향수, 혹은 ‘유니버셜(universal·보편적인)’ 향수로 불리기도 한다. 영국 BBC에 따르면 2018년 출시된 향수의 51%가 성 중립적 향수라고 한다. 2010년에는 성 중립 향수가 17%에 불과했다.  
같은 향이지만 뿌리는 사람에 따라 다른 향을 낸다는 콘셉트의 구찌 메모아 뒨 오더. [사진 구찌]

같은 향이지만 뿌리는 사람에 따라 다른 향을 낸다는 콘셉트의 구찌 메모아 뒨 오더. [사진 구찌]

지난해 9월 출시된 구찌의 ‘메모아 뒨 오더’ 향수는 대표적인 젠더리스 향수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와 조향사 알베르토 모릴라스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구찌의 첫 번째 유니버셜 향수로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미네랄 아로마틱’ 계열의 향을 중심으로 만들었다. 패키지도 90년대 초반의 오래된 구찌 향수를 본떠 단순하게 제작됐다. 미켈레는 “남녀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향수이기 때문에 병의 모양이나 사이즈가 너무 여성스럽거나 남성적이지 않기를 원했다”고 했다.  
젠더리스 향수로 출시된 바이레도 슬로우 댄스. [사진 바이레도]

젠더리스 향수로 출시된 바이레도 슬로우 댄스. [사진 바이레도]

향수 브랜드 ‘바이레도’ 역시 지난해 가을 젠더리스 향수 ‘슬로우 댄스’를 발표했다. 소년·소녀가 각각 남성과 여성이 되기 전 어색하고 떨리는 감정과 순간의 기억을 향기로 표현한 것으로 역시나 성별과 관계없이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브랜드는 제품에 대해 “여성스러움과 남성스러움, 씁쓸함과 달콤함, 밝음과 어두움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설명했다.  
소년과 소녀, 밝음과 어둠의 균형을 표현한 바이레도 향수 광고. [사진 바이레도]

소년과 소녀, 밝음과 어둠의 균형을 표현한 바이레도 향수 광고. [사진 바이레도]

영국의 니치 향수 브랜드 ‘제인패커’는 2018년 남녀 공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뉴트럴(neutral)’라인을 내놨다. ‘클레멘틴’‘세이지앤피그’‘튜베로사’ 등의 이름이 적힌 향수병에서는 성별에 대한 어떤 힌트도 찾아볼 수 없다. 단지. 남녀 모두 사용해도 좋을 부드럽고 감각적인 향을 지향한다.  
'뉴트럴'라인을 따로 출시한 제인패커. [사진 제인패커]

'뉴트럴'라인을 따로 출시한 제인패커. [사진 제인패커]

세계적인 디자이너 필립스탁이 2016년 출시한 향수 ‘스탁 파리(Starck Paris)’는 남성용, 여성용, 중성용(androgynous·양성의 특징을 가진) 세 가지로 구성돼 있다. 중성용 향수는 사향·목재·미네랄 등의 향료가 조합된 향을 선보인다.  
남성용, 여성용은 물론 중성용도 함께 출시한 필립스탁의 향수. [사진 필립 스탁 홈페이지]

남성용, 여성용은 물론 중성용도 함께 출시한 필립스탁의 향수. [사진 필립 스탁 홈페이지]

그 밖에 ‘젠더리스 향수’라는 표현을 쓰고 있진 않지만, 남성용인지 여성용인지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는 향수들도 많다. 이솝, 르라보, 펜할리곤스 등의 브랜드가 내놓는 향수들에는 성별 표기가 되어 있지 않다. 단지 개인의 취향에 맞게 선택할 수 있도록 향의 이미지를 표현한 이름만 표기돼 있다.  
젠더리스 향수의 시초로 불리는 CK원 향수. [사진 캘빈클라인 홈페이지]

젠더리스 향수의 시초로 불리는 CK원 향수. [사진 캘빈클라인 홈페이지]

젠더리스 향수의 특징은 향수 이름이나 병 모양에서 성별을 유추할 없다는 데 있다. 젠더리스 향수의 시초라 불리는 캘빈클라인의 ‘CK 원’ 향수(1994년 출시)는 투명한 병과 깨끗하고 무난한 향으로 남녀 모두에게 사랑받았다.  
셀린의 향수 시리즈, 오트 퍼퓨머리. 모두 같은 병 모양으로, 성별을 알 수 없는 이름만 적혀있다. [사진 셀린 공식 인스타그램]

셀린의 향수 시리즈, 오트 퍼퓨머리. 모두 같은 병 모양으로, 성별을 알 수 없는 이름만 적혀있다. [사진 셀린 공식 인스타그램]

지난해 8월 프랑스 명품 브랜드 셀린이 출시한 브랜드 최초의 향수 ‘오트 퍼퓨머리’ 역시 모두 같은 병 모양에 ‘단스 파리’‘블랙 타이’‘오드 캘리포니아’ 등의 이름만 적혀있다. 런던의 향수 브랜드인 ‘코모디티’는 책·가죽·이끼 등 단일 향료 성분이나 물체의 이름으로 향수를 구별하고, LA 기반의 유니섹스 향수 브랜드 ‘데드쿨(dedcool)’은 향수에 01, 02, 03 등 번호를 붙인다. 이들 향수는 모두 단순한 병 디자인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진 작품에서 영감받은 향수를 선보이는 브랜드, '올팍티브 스튜디오'의 뤼미에르 블랑. [사진 메종드파팡]

사진 작품에서 영감받은 향수를 선보이는 브랜드, '올팍티브 스튜디오'의 뤼미에르 블랑. [사진 메종드파팡]

향수 편집숍 ‘메종드파팡’을 운영하는 김승훈 대표는 “요즘에는 여성들도 ‘매니시’ 룩을 즐기고, 남성들도 부드럽고 중성적인 패션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아 향수도 이런 트렌드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메종드파팡에서 취급하는 향의 80%가 젠더리스 향수다. 김 대표는 “요즘 소비자들은 성별보다는 개인의 취향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다”며 “다양한 향기로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려 할 뿐, 성별을 구분짓는 데는 큰 관심이 없다”고 전했다. 
 
시장조사기관 ‘민텔(Mintel)’은 2018년 뷰티 트렌드를 예측하는 보고서에서 신체 유형이나 성별 또는 연령이 아닌, 개인의 관심사가 소비에 영향을 미친다며 ‘나의 아름다움, 나의 규칙(My beauty, My rules)’이라는 키워드를 제시했다. 민텔은 보고서에서 “소비자들은 전통적인 젠더 고정 관념에서 멀어지고 있으며, 따라서 브랜드들도 신제품 개발 및 마케팅 캠페인 전면에 성 중립적인 메시지를 전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했다.  
 
꽃 향은 여자를 위한 향, 나무 향은 남자를 위한 향이라는 생각은 이제 낡은 관습이 됐다. 성 중립 향수가 향수의 경계를 넓히고 있다.  
 
유지연기자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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