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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4년 전 코웃음, 이젠 ‘알파고 자식들’이 스승

중앙일보 2020.02.12 00:02 경제 7면 지면보기
일러스트 김회룡

일러스트 김회룡

지구상에서 가장 느리고 가장 오래된 게임인 바둑이 제일 먼저 첨단 인공지능(AI)의 세상이 될 줄은 몰랐다.  
 
2016년 구글의 자회사인 딥마인드(Deep Mind)로부터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결을 제안받았을 때만 해도 당시 한국기원의 실무 책임자였던 나는 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 허무한 꿈을 꾸나 싶었다.  
 
“컴퓨터가 수백만 판을 두며 인간 바둑을 공부한다 해도 그건 다람쥐 쳇바퀴 돌리기다. 인간의 상상력이나 감각까지 배울 수는 없다”고 나는 장담했다.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불과 3년여 만에 AI는 인간 고수들을 저만치 따돌리고 바둑의 신이 됐다.
 
이세돌과 대결한 알파고 리(Alpago Lee)는 16만 판의 인간 기보를 연구했다. 알파고 최종 버전인 ‘알파고 제로(Alpago Zero)’는 인간 바둑은 아예 보지도 않았다. 기초적인 바둑 룰만 알고 스스로 학습하여 알파고 리보다 강한 알파고 마스터(Alpago Master)에게 90%의 압도적 승률을 거뒀다. 알파고 제로는 논문 하나를 남기고 어느 날 표연히 은퇴했다.  
 
현존하는 바둑AI는 이 논문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모두 알파고의 자식들이라 할 수 있다.
 
바둑AI 바두기(Badugi)의 개발자인 이주영 고등과학원 계산과학부 교수는 “상위권 기사들이 바두기와 석 점을 깔고 둔다. 승률은 반반”이라고 말한다. 석 점이라니! 내 귀로 듣고도 믿어지지 않는다. 바두기는 NHN이 개발한 한돌(Handol)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바둑AI다.  
 
과거 일류 기사들은 바둑의 신과 둔다면 몇 점에 이길 수 있나 하는 질문을 받곤 했다. 대답은 비슷했다.  
 
“석 점이 아닐까. 넉 점이라면 목숨이라도 걸 수 있다.”
 
바두기나 한돌은 세계 AI 랭킹에서 3위권이다. 최강의 AI는 중국 기업 텐센트가 개발한 절예(絶藝). 2위도 중국의 칭화대학과 기업의 합작인 골락시(GOLAXY). 2019년 세계AI바둑대회 결승에서 절예가 골락시를 4대1로 꺾고 우승했다.
 
절예 역시 알파고 논문 덕분에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지금도 실력이 상승 중이라 한다. 절예와 알파고 최강 버전인 알파고 제로가 맞붙는다면 누가 이길까. 알파고의 논문은 95%만 공개됐다. 5%의 비밀을 간직한 알파고 제로가 더 강한 것 아닐까. 이주영 교수는 “여러 자료를 비교해볼 때 절예가 더 강한 것 같다”고 말한다.
 
절예는 중국 국가대표와 단독 계약을 맺고 있다. 절예의 최강 버전은 비밀번호를 아는 감독이나 일부 선수들만이 접속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아도 강한 중국바둑에 절예라는 비밀병기가 큰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이다.
 
현재 많은 프로기사들이 AI를 통해 바둑을 공부한다. 대국이 끝나면 컴퓨터 속의 ‘AI 선생님’에게 복기를 받으며 실력을 기르고 있다.  
 
물론 조치훈 9단 같이 AI를 외면하는 노장 기사들도 꽤 있다. 그는 “이 나이에 새롭게 AI로 바둑공부 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한다.
 
벨기에의 프로그래머가 만든 릴라제로(LeelaZero), 페이스북의 엘프고(ElfGo), 구글 직원이 만든 미니고(MiniGo) 등이 현재 프로기사를 포함해 많은 바둑인들이 애용하는 오픈 소스 프로그램이다. 요즘엔 바둑해설도 AI 없이는 곤란하다. 프로기사를 가장 많이 배출한 권갑룡 바둑도장은 최근 AI 프로그램을 도입하며 인간 선생님을 줄이는 구조조정을 했다. AI가 바둑 동네를 바꾸고 있다.
 
AI 이후 바둑 세계는 어떻게 변할까. 어떤 이는 “자동차 등장 후에도 인간의 달리기는 그대로다. 둘은 별개”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자동차는 달리기 선수를 코치할 수 없다. 그러나 바둑 AI는 인간과 대결도 하고 새 수법도 가르쳐 주기도 한다. 인정하기 싫지만 AI는 이미 바둑을 지배하고 있다.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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