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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기생충' 보고 봉준호에 바로 전화. 오스카상은 상상 못한 큰 경사"

중앙일보 2020.02.10 16:11
임권택 영화감독 [중앙포토]

임권택 영화감독 [중앙포토]

“한국 영화계의 큰 경사이자 잔칫날이다.”
10일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작품상을 받은 직후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노감독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2002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수상한 임권택 감독이었다. 세계 영화계에서 한국 영화의 가치를 재조명하게 만든 그였지만 한국 영화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인공이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날 경기 용인시의 자택에서 부인 채령 여사와 함께 TV에서 중계되는 아카데미 시상식을 시청했다는 임 감독은 “정말 예상하지 못한 큰 선물”이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임 감독이 중앙일보에 전한 소감을 구술 정리했다.
 
9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차지한 영화 '기생충'. [AP=연합뉴스]

9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차지한 영화 '기생충'. [AP=연합뉴스]

일생동안 TV를 세 시간 넘게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쩌면 한국인 최초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이 나올지도 모르는데 언제 발표가 될 지 예측할 수가 없으니 오전부터 꼼짝없이 TV 브라운관 앞에서 떠날 수가 없었다.  
앞서 각본상과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것도 정말 장한 일이지만 나는 개인적으로는 봉 감독이 감독상을 타줬으면…하는 마음이 있었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의 벽은 참 높았다. 과거에 ‘춘향뎐’을 비롯해 몇 차례 도전했지만, 번번이 문턱을 넘지 못했다. 참 야속할 정도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비영어권의 영화인으로서는 그 어떤 영화제보다도 도전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래서 봉 감독이 꼭 감독상 트로피를 품에 안기를 바랐다.  
 
드디어 감독상 수상자 발표에서 봉투를 쥔 스파이크 리 감독의 입에서 “봉준호”라는 호명이 나온 순간에는 가슴에서 전율이 일었다. 한국 영화가 드디어 아카데미 시상식에 서는 것을 보니 그동안 영화를 만들던 시간이 떠오르면서 내 일처럼 감개무량했다. 그 문을 열려고 그동안 얼마나 노력을 했었나.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옆에서 보던 아내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2002년 5월28일 인천공항에서 칸 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고온 영화 취화선의 임권택감독이 배우,스텝진과 같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곽경훈 명예기자.]

2002년 5월28일 인천공항에서 칸 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고온 영화 취화선의 임권택감독이 배우,스텝진과 같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곽경훈 명예기자.]

감독상도 정말 흥분했는데, 작품상까지 거머쥐는 것을 보고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눈물을 흘리던 아내와 둘이 아이처럼 손뼉을 쳤다.  
봉 감독의 수상 소감을 들을 때는 2002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취화선’으로 감독상이 호명됐을 때 쉴 새 없이 터지던 카메라 플래시와 이후 쏟아지는 취재진의 질문에 잠시 어안이 벙벙했던 기억도 잠시 떠올랐다. 봉 감독은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데다가 오스카 트로피까지 거머쥐었으니 참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해 ‘기생충’을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난다. 영화를 보고 나서 바로 봉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른 감독의 작품을 보고 감독에게 전화해 “좋았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날만큼은 정말 칭찬을 많이 했다. 빈틈이 없고 흠잡을 데 없이 잘 만들어진 영화였다. 봉 감독을 각종 영화제에서 가끔 보기는 했지만 내가 따로 만난 적은 없는 사이였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영화에 대한 느낌을 꼭 말해주고 싶었다.
 
반지하에 사는 기택(송강호)네 식구들은 장남 기우(최우식)를 시작으로 박사장네 부자 동네(두번째 사진)에 다가간다. 박사장 아내 연교(조여정)의 표정처럼, 계단(마지막 사진)은 이 영화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반지하에 사는 기택(송강호)네 식구들은 장남 기우(최우식)를 시작으로 박사장네 부자 동네(두번째 사진)에 다가간다. 박사장 아내 연교(조여정)의 표정처럼, 계단(마지막 사진)은 이 영화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기생충’은 어떤 특정 국가에서 벌어지는 독특한 문화를 담아 관객들을 힘들게 하는 면이 없다. 해외 어느 나라 사람들이 보든 알아보기 쉽고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미국이나 일본 등 외국에서도 흥행이 잘 된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그동안 우리 영화가 해외에서 좋은 상을 타도 전 세계적으로 크게 흥행에 성공하는 일은 없었다. 
여기에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과 작품상까지 거머쥐었다는 것은 한국 영화에 큰 의미를 갖는다. 이제 한국이라는 토양에서 만들어진 영화가 한국사회에 대한 특별한 이해력이 없이도 세계에서 통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나는 20대에 영화계에 들어와서 평생을 걸고 지금까지 종사하면서 내 인생 전체를 영화에 담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한국 영화가 이제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지지 않는 정상에 있다는 것이 증명된 것 아닌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기쁜 일이다. 다시 한 번 축하와 감사를 전한다. 봉준호 감독이 정말 큰 일을 했다. 그가 살고 있는 한국에서 같이 영화를 하고 있다는 것이 나에겐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정리=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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