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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메트의 소프라노 “강원도 산골소녀 초심으로 돌아가겠다”

중앙일보 2020.02.10 00:03 종합 18면 지면보기
강원도 정선 태생의 소프라노 홍혜란. 뉴욕을 중심으로 미국 무대에서 주로 활동한다. 임현동 기자

강원도 정선 태생의 소프라노 홍혜란. 뉴욕을 중심으로 미국 무대에서 주로 활동한다. 임현동 기자

소프라노 홍혜란(38)은 2018년 미국에서 오페라 공연을 마친 뒤 급하게 한국에 왔다. 아버지가 쓰러져서다. 아버지는 중환자실에서 열흘을 보내고 세상을 떠났다.
 

국내 돌아와 첫 앨범 낸 홍혜란
아버지에게 바치는 ‘희망가’ 12곡

“그때 든 생각이 ‘아버지에게 노래로 전하려던 마음을 결국 못 전했네. 늦었다’였다. 이탈리아·독일 말로 노래하면서 언젠가는 아버지가 알아듣는 한국어로 된 노래를 음반으로 내고 싶었는데, 더 훌륭해지면 하고 미뤄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서야 너무 늦었다는 생각만 들었다.”
 
홍혜란은 “아버지는 내가 노래하는 걸 늘 반대했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줄리아드 음악원으로 유학 갈 때도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게 야속해서 5년 동안 한국에 들어오지 않고 노래했다. 그는 “나는 온통 잘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아버지는 ‘힘들면 그만두고 와도 돼’ ‘행복한 게 제일이다’ ‘주변 사람들 잘 챙겨라’는 말씀만 하셔서 힘이 빠졌다”고 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카네기홀, 보스턴 오페라단 등에서 10여년 활동하고 난 지금에야 아버지의 말이 이해된다고 했다.
 
그는 강원도 정선 산골에서 자랐다. 문밖에 개울과 펼쳐진 산이 있었다. “은하수를 늘 봤다. 세상 밤하늘이 다 그런 줄 알았다. 진달래꽃을 꺾어 먹었고, 풀 베고 누워 구름 가는 걸 보며 시간을 보냈다. 개구리를 잡아 와 엄마에게 튀겨달라고 해 먹었다.”
 
홍혜란은 “그때 기억이 지금 내 음악과 나 자신을 지탱해준다”고 했다. “노래를 부를 때 기억 중 한 그림을 떠올리고, 그때 어떤 냄새가 났는지, 느낌이 어땠는지를 떠올리려고 한다.” 공연 기획자들은 소리가 밝고 싱싱한 그에게 기교 가득한 오펜바흐 ‘인형의 노래’를 줄기차게 제안하지만, 홍혜란은 “나와 맞지 않는 곡”이라며 R.슈트라우스의 ‘밤’ 같은 가곡을 선택한다. “태양이 떠오를 때의 금빛, 밤의 독특한 색을 표현하는 것이 자신 있다. 이걸 하는 게 내 진짜 노래다.”
 
그가 세계 무대에 알려진 건 2011년, 퀸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 성악 부문에서 동양인 최초로 우승하면서다. “내 목소리는 큰 무대에선 부족했다. 그런데도 큰 상을 타 부담이 컸다.” 이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 데뷔했고, 각종 공연 제안이 왔다. “이번에 잘 불러서 다음에 더 큰 역할을 따야지, 더 유명한 지휘자와 좋은 무대에 서야지 하는 욕심이 가득했다. 오죽하면 ‘경주마’라 불렸겠나.” 작은 체구, 크지 않은 소리 때문에 서양 오페라 무대에서 편견과 부딪혔고, 그걸 깨기 위해 “일부러 더 활발하게, 동양적이지 않은 여성인 척했다”고 한다.
 
최고 권위의 콩쿠르, 세계적 무대에서 노래했지만, 의심이 들었다. “이게 행복한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어느 날 관객 박수를 받고 무대 뒤로 왔는데 아무도 없었다. 남편(테너 최원휘)도 공연 여행을 자주 다녀 잘 만나지 못했고 친구도 없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시기와 맞물려 그는 “아버지가 노래 잘하라 응원하기보다 늘 행복해야 한다고 한 이유를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 뜻을 깨달은 홍혜란은 아버지를 위해 ‘희망가’ 앨범을 냈다. ‘희망가’ 등 한국 가곡 12곡을 담았다. “타이틀곡인 ‘희망가’는 더 성악가처럼 부를 수도 있었겠지만, 아버지의 음성을 흉내 내보려 했다. 한숨 쉬듯 작게 부르던 아버지의 따뜻한 음성을 따라 불렀다.”
 
지난해 9월 모교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교수로 임명된 홍혜란은 이제 경주마처럼 달리는 대신 주변을 돌아보며 노래하려 한다. 그는 “산골에서 노래하던 시절로 돌아가는 셈”이라고 했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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