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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피플] “영원히 블랙리스트로 둬도 좋다” 미국에 외친 화웨이 사령관

중앙일보 2020.02.10 00:02 경제 3면 지면보기

런정페이

런정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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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2일 스위스에서 열린 다보스 포럼에서 세계 정보기술(IT) 업계의 관심은 런정페이(任正非·사진) 화웨이 회장의 입에 쏠렸다. 미국의 제재 압박을 받으며 미·중 무역분쟁의 상징이 된 그가 어떤 발언을 내놓을지에 대해서다.
 

미국 “기밀유출”에 봉쇄된 화웨이
가성비 앞세워 영국 등 다시 뚫어
작년 5G장비 세계1위, 스마트폰 2위

5G장비 새 모드 나오면 경쟁 격화
미국 압박 여전해 앞날 낙관 못해

런 회장은 “미국의 압박에도 모든 경영 업무는 안정적이었으며, 이런 경험으로 더욱 강력한 팀을 가지게 됐다”며 “올해 미국이 더 많이 공격할지 모르겠지만, 화웨이 사업에 끼치는 영향은 심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는 “미국은 오랜 시간 세계 최고가 되는 것에 익숙해졌고, 모든 것에서 최고가 되기를 원한다”면서 “(이 때문에) 다른 누군가 더 잘한다고 하면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라고 미국을 꼬집기도 했다.
 
화웨이가 이른바 ‘백도어’ 장치를 통해 각국의 기밀을 입수하고 있다고 판단한 미국은 지난해 5월 국가 안보 위협을 이유로 화웨이를 블랙리스트에 올리며 사실상 미국 기업과의 거래를 차단했다. 여기에 동맹국에게 5세대(5G) 네트워크 구축 사업에서 ‘화웨이 장비 또는 기술을 쓰지 말라’며 압박했다. 화웨이는 핵심 부품·기술을 사지도, 자사 제품을 팔지도 못하게 된 셈이다. 시장에선 화웨이가 크게 휘청거릴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스위스에서 열린 다보스포럼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는 런정페이 화웨이 회장. [AFP=연합]

스위스에서 열린 다보스포럼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는 런정페이 화웨이 회장. [AFP=연합]

화웨이의 지난해 매출은 전년 대비 18% 증가한 1200억 달러를 기록한 것으로 추산된다. 시장조사업체 카날리스에 따르면 화웨이는 지난해 세계 스마트폰 시장에서 전년 대비 17% 늘어난 2억4000만대를 판매해 삼성전자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시장점유율은 2018년 14.8%에서 지난해 17.6%로 올랐다.
 
5G장비 시장에서도 선전하고 있다. 화웨이는 지난해 3분기까지 65건이 넘는 5G 이동통신 장비 납품 계약을 맺고 40만개 이상의 5G 기지국을 수출했다. 덕분에 화웨이는 지난해 3분기 기준으로 5G장비 시장점유율 1위(30%)를 차지했고, 전체 통신 장비 시장에서도 34%로 1위였다.(IHS마킷 조사) 런 회장이 “우리를 영원히 거기(블랙리스트)에 둬도 좋다”며 거듭 자신감을 피력한 배경이기도 하다.
 
세계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세계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미국이 때려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우선 13억 인구를 기반으로 한 든든한 내수시장 덕분이다. 미국의 제재가 중국 소비자의 반발을 불러오면서 ‘화웨이 제품을 사자’는 ‘애국 소비’ 바람이 불었다. 스트래티지애널리틱스에 따르면 1분기 화웨이 스마트폰의 중국 시장 점유율은 33.7%였지만, 3분기에는 43.5%로 급등했다.
 
위기 대응 능력도 빛났다. 비상경영 체제를 가동해 전 세계 170여국에 있는 고객사의 요청에 24시간 즉각 대응했다. 신뢰를 지키기 위해서다. 미국 구글의 운영체제(OS)인 안드로이드를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자체 개발한 ‘훙멍’을 선보였고, 주요 부품도 미국산 대신 유럽·일본·중국산 등을 활용했다. 이를 진두지휘한 사람이 바로 런 회장이다.
 
전세계 5G 통신장비 점유율.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전세계 5G 통신장비 점유율.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당황한 쪽은 미국이었다. 믿었던 ‘우군’인 영국은 미국의 반대에도 화웨이 5G장비를 국가 안보와 큰 관련이 없는 영역에 한해 허용하기로 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화웨이 장비를 쓰지 말라고 한다면 그 대안을 함께 제시해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캐나다도 비슷한 제한적 도입을 검토 중이다. 반(反) 화웨이 동맹인 영어권 5개국 기밀정보 동맹체 ‘파이브 아이즈(Five Eyes)’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여기에 미국 반도체·소프트웨어 기업들은 미국 정부에 화웨이 제재를 풀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이들 입장에서는 화웨이가 자사 제품을 사주는 ‘큰 손’이기 때문이다. 미 행정부 내에서도 비슷한 의견이 나오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미국 상무부는 최근 화웨이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려 했으나, 오히려 미국 기업에 더 큰 타격을 줄 수 있다는 반대 의견이 나오면서 결국 계획을 미뤘다.
 
지난해 세계 스마트폰 판매.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지난해 세계 스마트폰 판매.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물론 이는 화웨이의 제품 경쟁력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화웨이의 통신 장비 가격은 타사 대비 30~40%쯤 저렴한 데다, 지난해 2400여건의 미국 특허를 취득해 특허를 많이 받은 기업 10위에 오를 정도로 기술력도 탄탄하다.
 
하지만 화웨이의 길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많다. 현재 5G장비 시장은 LTE장비와 망을 함께 쓰는 비단독모드(NSA)이기 때문에 화웨이에 유리하다. 그러나 5G장비만 독립적으로 쓰는 단독 모드(SA)가 본격화하면 새로운 경쟁 환경이 조성된다. 중국 내부에서는 화웨이가 퇴직자를 부당하게 고소해 억울한 옥살이를 시킨 사건이 드러나면서 ‘애국 소비’에 찬물을 끼얹었다. 또 화웨이가 독자 OS를 기반으로 자체 생태계 구축을 추진하고 있으나, 이미 구글·애플 양대 진영을 주축으로 형성된 IT 생태계를 재편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화웨이에 대한 제재를 풀지 않으려는 미 정부의 ‘마이웨이’가 큰 장벽이다. 미 정부는 런 회장이 인민해방군 출신이자 공산당원이라는 점, 화웨이가 급성장한 배경에 인민해방군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다는 점을 들어 화웨이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올해 77세에 접어든 런 회장의 노련한 리더십이 화웨이의 ‘독자 생존’을 가능케 할지 올해가 진정한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손해용 경제에디터 sohn.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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